(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994년 내전으로 발생한 대규모 난민사태 때문에 르완다는 한국민간단체들이 최초로 해외에 구호 요원을 파견했던 현장이다. 개인적으로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KFHI) 구호팀의 일원으로 참여할 기회가 있어 콩고(La République démocratique du. Congo, 당시 Zaire)에 파견되어 미디어에서만 보던 난민촌을 직접 가보게 되었다. 어스름한 저녁이면 운반 차량을 기다리며 거적에 말려 길가에 뉘어져 있던 시신들…. 화장실이 없어 바위 밑에 웅크리고 설사를 하고 있던 어린이들…. 추위를 이기느라 피운 모닥불의 자욱한 연기와 매캐한 냄새….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프가니스탄과 우간다에서도 이유와 상황은 다소 달랐지만 고향을 등진 사람들의 고단한 삶은 동일한 것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난민들은 ‘난민’이라는 단어 하나로 묶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모습들을 갖고 있다. 흐릿한 눈빛에 멍하게 먼 산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사소한 것이라도 움켜잡으려 하고 또한 팔기도 하면서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 눈에 띈다. 인근 강이나 호수에서 잡은 물고기를 말려서 파는 아이들도 있고, 배급받은 옥수수나 식용유를 인근 지역주민들과 필요한 생필품으로 바꿔오기도 한다. 자동차 배터리로 핸드폰을 충전해주거나 대신 전화를 걸어주면서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도 자국 화폐와 난민촌이 있는 나라의 화폐, 심지어 달러를 사고파는 환전상도 생겨난다. 난민들의 상행위는 자연발생적이며. 실제로 장기화되는 난민촌의 경우 UN과 NGO들이 시장터를 지어주거나 간단한 비즈니스 훈련을 시켜주며 이를 장려하기도 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적십자 구호 요원은 파키스탄에 생긴 난민촌에서 일하면서 한 가족이 두 개의 텐트를 치고 가족이 나뉘어 거주하면서 UN이나 NGO 사람들을 속여서 두 가족 분량의 구호물자를 챙기는 경우도 봤다며 쓴웃음을 진다. 난민촌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 피난을 와서 장기간 난민촌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 난민으로 살아가기를 더 원한다. 떠나온 곳의 삶이 더 힘들고 돌아가도 마땅히 반겨줄 사람도 없다면 왜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외국으로 먼저 이민 간 친척이 있으면 어떻게든 난민촌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난민촌을 고향으로 생각하며 영구히 머물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민촌은 그들 모두가 함께 살아간다.
푸른색 흰색 텐트들이 줄지어 있는 난민촌은 초기 혼돈의 시간이 지나면 나름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새로운 곳에 생겨난 난민촌이지만 피난 오기 이전의 사회의 모습을 재현하려 한다. 교회는 난민촌 어디에서나 생겨나고 큰 텐트를 구해서 교회로, 때로는 각종 모임의 장소로도 활용된다. 구호단체의 지원을 받아 세워진 아이들을 위한 학교도 있다. 나름의 주민조직도 생기고 리더도 선출되고, 금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군인이나 경찰이었던 사람들의 조직도 생겨나고 심지어 정치적인 선전과 선동도 일어난다. 언젠가 난민촌 내에 활동하는 르완다 범죄조직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이름도 무시무시한 ‘검은 해골단’(black skeleton) 이었다.
르완다의 비극은 후투족과 투치족, 두 부족 사이의 갈등과 학살의 역사가 1962년 독립 후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는 나와 같이 구호팀의 일원으로 콩고 우비라(Uvira)라는 곳에서 근무하던 딘 윈첼(Dean Winchell)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난민촌에서 어찌어찌해서 투치족 한 명이 붙잡혀왔는데, 난민들은 그를 살해하고 그 머리를 장대에 달아서 행진까지 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나는 현재 르완다 PIASS 대학교(Protestant Institute of Arts and Social Sciences)에서 개발학을 가르치고 있다. 어느 날 일본인 카주유키 사사끼 박사님의 ‘Peace-building & Development’라는 과목의 세미나 수업에 참석했다. 사베리아나(Saveriana Mukagatar)라는 투치족 여성과 타데오(Thadeo Habiyakare)라는 후투족 남성이 특별손님으로 초대되었다. 타데오는 학살에 참여한 후투족 가해자이고 사베리아나는 투치족 피해자였다. 내가 직접 수업 시간에 사베리아나에게 물어봤다. 죽음으로 내몰리던 그 날의 공포와 아픔을 생각하면 가해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그분은 피해당한 상처로 제대로 다물어지지도 않는 입에서 바람이 새나가는 소리로 차분하고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 그날의 기억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해치던 자들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그런 상황에 내가 처했던 것에 대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오는 표현하기 힘든 짙은 슬픔입니다.”
우리가 ‘나와 너’라는 다양성을 허용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서로가 다름을 차별의 범주로 만들어버리면 사실 우리는 모두 난민으로 전락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가 되고 차별하고 싸우게 되면, 그곳에 바로 지옥의 문이 열린다. 천국 가는 길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화해하는 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난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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