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콩고 난민 여성 미야(Miyah)를 만난 건 2006년 6월이었다. 초여름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일요일, 아이 둘을 데리고 처음으로 세계난민의날 캠페인에 따라 나섰다. 남편은 이미 난민들과 여러 번 만난 이후라서 몇몇 아는 분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나는 낯설고 어색해 말을 건네지 못한 채 ‘Refugee welcome’이라고 적힌 노란 풍선을 들고 행렬을 따라 걸을 뿐이었다. 한참을 걷다 더위에 지친 6살, 3살 아이들이 칭얼대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자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았을 때였다. 피부색이 검고 인상이 좋은 여성이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배가 제법 부른 모양새가 만삭이 다 되어 보였다. 영어로 인사말을 건네다 보니 콩고에서 왔다기에 프랑스어로 잠깐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눈 후 헤어졌다. 그때만 해도 전혀 몰랐다. 이후로 15년이 넘게 짙은 인연이 이어질 줄은.
2007년 봄, 전공을 살려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난민들의 서류 번역을 도와주던 단계에서 크게 한 발 나아가, 난민 지원단체 ‘피난처’ 대표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콩고 엄마들의 한글반을 맡기에 이르렀다. 첫 수업 날은 어찌나 부들부들 떨리던지. 서류로만 접하던 아프리카 난민들 4명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했고, 막상 전공은 했지만 프랑스어 회화 실력은 형편 없었기에 긴장감이 올라갔다.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도착한 콩고 엄마들은 시흥에서부터 서울까지 아이들을 데리고 2시간 넘게 오느라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밝게 웃어 보였다. 그 네 명 중에 한 명이 바로 미야였던 것이었다. 이후로 미야는 수업에 가장 집중하고 숙제도 빠짐없이 해 오는 우수 학생으로 거듭났고, 내 부족함을 채워주며 친구들이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모습이 늘 고마웠다.
콩고 엄마들과 6개월 쯤 수업을 진행했을 때, 우리는 이미 선생님과 학생이 아닌 친구로 변해 있었다. 관계가 편해져서인지 미야와 미쇼를 비롯한 친구들이 조심스럽게 건의 사항을 내놓았다.
“마담 박(*프랑스어로 존경을 담아 여성을 부르는 표현), 우리 믹스커피 안 마셔요. 방석도 불편한데 혹시 의자에 앉아 수업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실 처음에는 마담 박의 프랑스어를 잘 못 알아들었어요.”
6개월 동안 선생님인 내가 미안해할까봐 불편함을 참아준 친구들에게 어찌나 고맙고 민망하던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 판단대로 믹스커피를 타 주고 방석을 깔아주었으니, 나 역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아니었나’ 반성을 하기도 했다. 먼저 물어보고 대접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저 베푼다는 생각이 강했던 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이후로 절친이 된 4명의 콩고 여성들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발견하고 나서 2009년에 <에코팜므>라는 단체를 세웠다. 유쾌하고 지적이며 책임감이 강한 미야와 미쇼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정서를 담은 그림을 그려 엽서와 티셔츠 도예 제품 등을 개발해 나갔다. 그림이라는 도구는 참 신기하게도 콩고 여성들의 이방인으로 살며 쌓인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기도 하고, 게다가 난민으로 살며 언제 떠나야 할지 모르는 긴장된 마음을 풀어주기도 했다. ‘오르그닷’이라는 꽤나 유명한 사회적 기업과 협업을 통해 유기농 티셔츠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였다. 런칭 파티 자리에서 이제 제법 아티스트의 분위기가 나는 미야와 미쇼에게 자신들의 그림을 넣어 제작한 티셔츠를 증정하는 시간을 가졌다. 미야는 대뜸 이런 소감을 밝혔다.
“저는 참 뭉클해요. 한국 사람들이 콩고의 문화를 입고 다니는 거잖아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찌릿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나 미야는 이제 ‘에코팜므’의 2기 대표로 성장했다. 난민을 위해, 난민과 함께 일하는 단체이므로 난민 본인이 대표가 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미야에게 대표직을 넘겨주었다. 아직 한국어 실력이 서류를 작성하거나 미팅을 원활하게 진행할 만큼은 아니지만, 유창한 프랑스어와 영어 실력, 특유의 진중함과 끈기, 난민 당사자라는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더 탄탄하게 단체를 발전시켜 나가리라 기대한다.
난민과 함께 15년을 친구로 동료로 지내오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이방인에게 박한지 시시때때로 절감한다. 우리는 ‘우리’라는 테두리가 너무 강해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 이방인만 겨우 테두리의 가장자리에 넣어준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자면, 난민은 나그네 중에 가장 나그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친해지고 나면 난민도 그냥 사람이다. 다만 특별한 어려움에 처해 자기 나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우리가 손님으로 대접한다면 이 땅에서든 돌아가서든 자기 역할을 톡톡히 해낼 사람들이다. 올 연말, 이웃의 범위를 넓혀 피부색과 문화가 다른 이방인을 내 삶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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