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작년 12월 캄보디아인 여성 노동자 속헹(31세) 씨가 기숙사에서 사망했다. 영하 18도까지 기온이 내려간 날, 경기도 포천의 한 채소농장 숙소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그녀는 취업비자로 입국해 채소 재배 노동을 5년 가까이 한 이주노동자였다. 제 고향으로 돌아가기 직전 변을 당했다. 기숙사에서 함께 지낸 동료 노동자들은 그 사망 이틀 전부터 짐승 우리같은 불법 가건물 숙소의 난방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020년 12월 얼어죽은 속행 씨가 거주했던 비닐하우스 기숙사)
경제규모 세계 10위, 일 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인 국가 코리아에서 이주노동자가 동사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국내외 언론이 집중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 사건 직후 조직된 ‘이주노동자 기숙사문제대책위원회’에 소속되어 활동한 나에게 하루는 영국 BBC방송 서울 특파원 로라 비커가 찾아왔다. 긴 인터뷰를 하는 가운데 그녀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이주 노동자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고용주와 이주 노동자 사이를 철저한 주종관계로 만드는 법과 제도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 관계가 이주 노동자의 모든 기본권, 인권, 노동권을 침해하는 근본 원인입니다.”
그렇다. 외국인 노동력을 들여오기 위해 국회가 만들고 정부가 집행하는 법과 제도가 ‘고용허가제’인데, 이는 고용주에게 절대주권을 준다. 이 제도는 이주노동자의 일터 이동의 자유와 권리를 박탈한다. 또한 고용주의 사인을 받아야만 이주노동자는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고용 연장이나 재입국 취업도 사업주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 제도 아래 있는 이주노동자는 그 어떤 열악한 노동조건이나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요청을 고용주에게 감히 하지 못한다. 고용주에게 밉보이면 당하는 불이익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사업주가 이주노동자를 ‘말하는 동물’이나 노예처럼 부려도 이주노동자는 대개 굴종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한파에 얼어 죽을만한 열악한 기숙사에 기거하는 어느 이주노동자가 안전한 기숙사를 제공하는 농장을 찾아가고 싶어도 스스로 갈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고용주의 사인 없이는 일터 이동을 할 수 없다는 법과 제도가 만든 현실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하는 이주노동자는 130만 명 정도다. 그들은 주로 내국인이 가지 않는 일터에서 일한다. 고용허가제는 내국인을 고용하지 못하는 사업장에만 외국인노동자의 고용을 허가하기 때문이다. 대개 3D 업종이다. 농업, 어업, 제조업, 건설업, 식당 같은 서비스업, 간병업 등에서 노동한다. 밑바닥 산업이 외국인노동자 없이는 안 돌아갈 정도다. 몇 해 전 이주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단체 등이 헌법소원을 낸 적 있다. ‘일터 이동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심하게 제한하는 고용허가제는 위헌적이라는 판단을 하고 헌법소원을 낸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은 확고했다. 고용허가제는 위헌성이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쉽게 말해, 이 이유는 자국민 보호를 위해 외국인노동자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확하게 표현하면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해서는 외국인노동자를 얼마든지 차별할 수 있다는 의미도 갖고 있다.
한국은 지구촌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다. 산업화된 나라들 가운데 가장 불평등하다. 1:99 사회라고 할 만하다. 상위 기업 10%가 나라 전체 기업 이익의 90% 정도를 독식하는 사회·경제 구조를 갖고 있다. 또한 상위 10%가 나라 전체 부동산 자산의 95%를 독점하고 있다. 하위 50%가 소유한 자산은 나라 전체 자산의 2%도 안 된다. 이주노동자들은 극심한 격차사회 코리아의 먹이사슬 끄트머리에 있다. 그들은 국민 밖의 국민이고 계급 밖의 계급이다. 나는 그들을 내부식민지로 본다.
외양간에서 태어나 목수 노동을 하며 살았던 예수. 그는 지극히 작은 자들 속에서 작은 자로 살았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1:99 사회로 전락한 이스라엘에서 갈릴리는 지극히 작은 자들이 모여 살던 변방 지역이었다. 공생애 대부분을 그 소외된 지역에서 보내신 예수는 부활한 뒤에도 갈릴리로 가셨다. 성경의 뿌리인 출애굽 사건, 곧 노예 해방 사건을 지구촌 전체에 마음 내면의 해방에까지 영구히 확장하고 심화시키기 위해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약하다 로마 제국과 이스라엘 지배권력자들에게 잡혀 죽임당한 예수가 다시 살아나 찾아가신 곳이 갈릴리다. 복음서 가운데 맨 처음 쓰인 마가복음은 이 사실을 강조한다. 그 예수께서 들려주신 비유 가운데 이른바 '양과 염소의 비유'(마태 25장)는 의미심장하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이는 그 비유가 가르치는 핵심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작은 자는 이주노동자들이다. 오늘 우리가 이주노동자들과 맺는 관계의 성격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와 맺는 관계의 성격이 되는 것이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첩경은 이주노동자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은 곧 예수와 대등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주종관계가 아니라 서로 섬기는 관계인 대등 관계로 이주노동자를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멸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학대하고 죽이는 것은 곧 예수를 멸시하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학대하고 죽이는 것이다.
(2020년 1월 보일러 폭발 사고로 노동자 2명 사망과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던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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