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전세계에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그런데 한류의 힘을 기뻐하기보다 아쉬움이 교차하는 것은 왜 그럴까? 영상에서 펼쳐지는 폭력성, 잔인함, 냉혈함 등 때문만은 아니리라. 스토리를 구성하는 배경의 사회 현상이 자본주의의 말기적 현상과 붕괴를 예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 양극화! 사람이 돈에 노예가 되어 물신(物神)에게 쫓기다 찾아간 해결책. 설마 그런 게임일 줄이야. 게임으로 빚 청산을 하려는 소시민적 바램은 자신의 목숨을 건 냉혹한 게임. 참여자들은 하나, 둘 사라져가고 남는 자는 단 한 명만 살아남는다는 설정은 게임이라도 절망의 절망이다. 종말론의 비극보다 더 참혹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왜 그들은 이런 비극적 상황에 내몰리게 되었는가? 첫째는 개인적 선택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능력을 넘어 돈을 추구한 게 문제였다. 그 결과는 책임질 수 없이 쌓인 빚. 둘째는 사회 구조 때문이다. 그들이 속한 사회는 돈을 문제의 답안으로 부추긴다.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믿는 이들은 어쩌면 순진한 건지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직간접으로 돈을 최고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미국발 금융 사태나 우리나라 ‘영끌’ 사태는 모두가 돈으로 달려가게 만든 결과 아닌가. 우리 사회는 그만큼 병들어 있고, 윤리적으로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건실한 시민을 점점 난민으로 내모는 구조라는 의미이다.
<오징어 게임>에는 “이것이 적나라한 현실이다”라는 외침이 들어있다. 돈의 노예가 된 사회, 비정한 물신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지적한다. 그들을 노리개로 삼는 소위 VIP들은 또 누구인가. 감독은 비탈진 현대 사회에 대한 충격요법으로 이런 표현방식을 선택했다. 부정한 사회는 난민을 만들어낸다. 부정한 윤리가 난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드라마 속에서 난민은 압둘 알리다. 한국에 코리안드림을 이루기 위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꿈은 흔들리고 끝내 게임에 인생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우리나라 이주노동자들은 동남아 출신이 많다. 때로는 멸시를 받으며 월급도 받지 못하고 불법체류자 신분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다. 알리의 처지도 비슷했다. 알리는 약삭빠른 증권맨에게 진심으로 다가가지만 비정한 속임수에 당한다. 결과가 비극적이다.
우리의 문화와 관습에 익숙하지 못한 이주노동자는 이용당하다 목숨까지 잃는다는 설정이다. 이주노동자로서의 알리와 함께 게임장에 들어선 모든 참여자도 따지고 보면 다 난민이다. 돈 때문에, 상황 때문에 가족, 직장, 고향을 떠난 그야말로 소외된 난민들이다. 현실 터전은 사라지고 그들이 살아가는 실존은 피 튀기며 쫓고 쫓기는 살벌한 현실이다. 섬 밖의 현실이라고 천국과 같은 곳일까.
‘난민’은 이 지점에서 상징적이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난민 상황은 소외(entfremdung)이다. 난민은 정치적, 경제적인 곤란함으로 터전을 떠난 이들만이 아니다. 외부적 요인으로 내면을 상실하고 혼란을 겪는 이들이라 하겠다. 난민은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소외에 더하여 정신적 소외를 겪는다. 자아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자아 분리는 모든 관계를 왜곡한다. 정상적인 관계는 기대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각자는 무엇보다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은 원초적 욕망과 허세에 사로잡혀 있다.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가.
우리 인간은 본래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고귀한 존재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임마누엘의 은혜로 이 땅에서 거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에덴의 조건’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죄의 문제가 유혹과 미혹으로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소외는 현실이 되었다. 영적으로는 모두가 난민이 되어 방황하고 유리하며 살아간다. 육적으로는 난민의 경계를 오간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역사의 주관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길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오징어 게임>에서는 너와 내가 모두 육체의 ‘정욕과 소욕’(갈 5:17)에 따라 살다가 ‘난민’이 되었다. 이 극적 설정이 결코 현실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으랴. 개인의 윤리, 사회의 공의만 가지고는 난민의 비극을 극복할 수 없다. 부분적 처방으로는 총체적 불의를 해결할 수 없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오직 불가항력적 은혜와 사랑만이 이 인간 조건(conditio humana)을 해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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