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난민’이란 사전적으로 “인종, 종교 또는 정치적, 사상적 차이로 인한 박해를 피해 외국이 다른 지방으로 탈출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020년 기준으로 2,640만명의 난민이 전세계에 분포되어 있는데 이들은 오늘도 최소한의 존엄마저 위협받으며 불확실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호의적이지 않다. 우리나라 국민은 ‘난민 포비아’라고 할 만큼 난민을 대하는 시선이 부정적이다. 얼마 전에 아프카니스탄 ‘난민’을 받아들일 때 ‘한국 협력자’라는 이름을 둘러대야 할만큼 난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유럽에서 화제가 되었던 난민소녀 ‘리틀 아말’(Little Amal) 퍼포먼스가 국내에서 펼쳐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우리가 난민 입국을 거절할 이유를 댄다면 수없이 많을 것이다. 그럴 때면 외신에서 접했던 시리아 20대 청년의 말이 가슴에 철렁 내려앉는다. “우리는 난민이나 망명 신청자가 아니다. 우리는 학생, 의사, 교사이지 숫자가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사연이 있고 과거가 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러면 미술가들은 난민을 어떻게 보았을까? 사진작가 전해리는 파키스탄 지진 피해 현장을 찾아간 것을 시작으로 최근까지 세계 전역의 분쟁 지역에서 난민의 참상을 생생한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해 전 세계에 전했다.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난민들의 여정에 함께하며 바다를 건너고 국경을 넘는 시리아 난민들의 탈출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가는 그들이 아이들의 장래를 걱정해 위험마저 불사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거리 예술가 뱅크시(Banksy)는 누구보다 난민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지닌 작가이다. 그는 팔레스타인 지구에 있는 한 호텔에 <2017년의 지중해 광경>이란 작품을 기증하였다. 자유를 찾아 떠돌다가 바다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처참한 삶을 환기시키는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뱅크시는 반짝이는 네온 핑크 플레어를 들고 구명조끼를 입은 이주 아동의 벽화를 그린 적이 있고, 2015년에는 ‘정글’(the Jungle) 로 알려진 프랑스 북부 칼레 난민 캠프에서 스티브 잡스(Steve Jobs)의 이미지를 스텐실로 표현하기도 했다.
많은 인물중에서도 스티브 잡스를 선택한 것은 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난민 출신, 즉, 시리아계 아버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난민들을 돕는 것이 국가의 재원 낭비로 생각되지만 스티브 잡스는 시리아 이주자의 아들이었다.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회사이며 연간 70억 달러 이상의 세금을 내고 있으며 이것은 시리아 출신의 청년을 허용했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것이 뱅크시가 칼레의 벽화를 제작하게 된 이유이다.
중국 출신 설치미술가 아이웨이웨이는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각국을 떠도는 난민들을 실물 사이즈의 인체 모형으로 다루었다. 또 난민들의 신발이나 옷가지 등을 모아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험란한 여정을 암시하기도 했다. 시리아에서 부모를 따라 피난길에 올랐다가 터키 인근에서 조난 사고를 당한 알란 쿠르디(Alan Kurdi)의 주검을 담은 충격적인 사진을 보고 난민 문제에 뛰어든 아이웨이웨이는 “난민의 위기는 난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이다. 삶의 필수적인 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투쟁보다 재정적 이익을 우선하는 태도는 이 위기의 주요 원인을 제공한다.”라고 문제의 원인을 밝혔다.
우리나라도 난민 문제에 있어서 예외가 아니다. 한국계 화가 니콜라이 신(Nikolai Shin 1928-2006)은 스탈린 당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카레이스키 중의 한 명이었다. 한국인 17만 명이 스탈린의 분리·차별 정책에 의해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황무지로 옮겨졌다. 이 과정에서 무려 2만 5천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이 신은 화가가 된 이후 수십 년 동안 동족의 역경과 고난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연작 ‘레퀴엠’은 고난의 땅에서 받은 고통을 생생히 증언한다. 유민사의 기억은 우리도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알려준다. (그림 3)
난민은 나그네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전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참된 위로와 평안이 있는 집을 찾아가는 나그네, 즉 ‘난민의 영성’으로 묘사한다.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인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을 향해 길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의미에서 난민의 처지와 비슷하다는 뜻이다. 길 위의 삶이란 험난하고 불확실하며 배고픔과 목마름, 선동과 유혹, 한숨과 시련으로 얼룩져 있다.
그리스도인은 현재에 정착하고 만족할 수 있다고 상상하게 만드는 유혹을 경계하면서 현재의 거짓 약속에도 속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길 위의 삶을 걷는 그분의 백성에게 이방인과 나그네의 운명에 특히 민감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그들을 바로 우리의 이웃, 즉 ‘강도 만난 사람’으로 보라는 말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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