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그리스도인은 이중국적자다. 마치 일 세대 미국 이민자와 같다. 그의 일상은 미국 시민이다. 낼 세금 착실하게 내고, 챙길 것도 열심히 챙겨 먹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 사는 미국이 아니라 늘 태평양 건너 한국이다. 어디에 있든 내가 읽는 신문도 주로 한국어판이다. 어눌한 영어 덕에 ‘미국’ 주류 사회와는 늘 적당한 거리가 유지된다. 평소엔 무난하지만, 때로 두 나라의 이익이 어긋난다. 그럴 때면 교차로에서 멈칫멈칫 선택을 고민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다.” 두루뭉술 스케치로는 제격이다. 그런데 막상 별 도움이 안 된다. 고민은 대부분 내 이중적 정체성 자체가 아니라, 이 정체성이 서로 싸우는 ‘현장’ 이야기니까. 그렇다면 이 원론을 파고들어야 얻을 게 없다. 우선은 ‘이 세상’과 다른 내 소속을 알아야 한다. 나의 초월적, 복음적 정체성이다. 이 정체성은 내가 발을 디딘 이 세상에 속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도 눈여겨 살핀다. 물론 서로 별개의 몸짓이 아니다. 내 마음을 둔 세계와 내가 발이 선 세계가 맞물리는 춤사위다. 이 복잡한 얽힘 속에서 내 몸은 어디에 힘을 실어주어야 할까?
원론은 쉽다. 내가 속한 나라에 맞게 선택하면 된다. 그런데 실제 이 그림은 더 복잡하다. 두 세계의 얽힘을 말하지만, 실제 싸움터는 늘 이 세상이다. 나는 세상을 살고, 세상의 뉴스를 듣고 생각한다. 온갖 생각과 욕망이 복마전을 이룬다. 그 속에서 내 길을 찾는다. 독창적 구조를 창출하는 주관식 답변이 가능할 때도 있지만, 대개 이 세상이 허용하는 제안 중 하나를 고른다. 상충하는 세상의 제안 중 ‘제일 나은 것’ 혹은 ‘덜 나쁜 것’을 선택한다. 그래서 선거(選擧)는 세상이 그려내는 욕망의 미로 속에서 어렵사리 선택하며 길을 찾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 장면 중 하나다.
선거 자체는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부품을 사서 마음껏 조립하는 게 아니라, 미리 조립된 몇 가지 사양 중 하나를 고른다. 후보들은 저마다 자기 정책을 조립해 제시한다. 사안 하나하나를 견주는 일은 힘들다. 하지만 최종 선택은 의외로 쉬울 수 있다. 정책의 전체 패키지는 후보와 소속 정당의 색깔을 닮는다. 평소 행보를 보아 왔다면, 그 색에 대한 평가와 결정도 그리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할 만큼 선택이 힘든 상황은 아니다. 복음의 정치적 요구는 비교적 선명하다. 약자를 배려하는 공평과 정의다. 이번 선거에서, 누가 이 원리와 가까운지는 꽤 선명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이번 선거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삶처럼, 정치 역시 욕망의 복마전이다. 아무리 잘 골라도, 기성복이 아주 마음에 들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각 후보를 비교하며 장점, 단점의 무게를 견준다. 참아줄 수 있는 게 있고,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선거가 어렵다는 느낌은 아마 이런 이유일 것이다. 원치 않는 것까지 ‘패키지’로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작든 크든 나쁜 정책을 수용하는 일은 늘 어렵고 불편하다. 그래서 선거는 불편하고, 이 불편은 우리의 생각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와 세상, 복음과 정치가 만나는 방정식은 늘 다양했다. 특정 답안을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풀이 과정은 필요하다. 선택의 동기가 투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선택은 동시에 내 신앙적 결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족과 불만이 뒤섞인 선택이라면 더 그렇다. 우리는 선택지를 따진다. 개인의 자질도, 속한 정당의 색도 따진다. 중요한 것은 상황을 따지는 내 사유의 선명성이다. 전제된 선택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특정 정책과 후보에 대한 내 선택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택할 것인지, 내가 무슨 근거로 그런 선택을 하는지 묻는다. 후보에 대한 물음인 만큼,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가진 신념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올바른 선택의 큰 걸림돌 중 하나는 혼탁한 소통 과정이다. 주요 언론은 공정과 거리가 멀다. 온갖 미확인 정보가 사적 경로로 마구 유통된다. 타당한 정보와 엉터리 소문이 뒤엉킨다. 어렵고 피곤하지만, 그래서 정보 검증은 피할 수 없다. 물론 여기엔 정보에 대한 내 태도나 정보 습득 경로에 대한 반성도 포함된다. 많은 소리가 뒤섞일수록, 내 욕망에 주파수를 맞추기 쉽기 때문이다. 정보가 혼란스럽다는 느낌은 내 사유가 욕망에 휘둘릴수록 더 강해진다. 선거는 유통되는 정보를 검증하는 연습이자, 이를 대하는 내 태도를 반성하는 기회다.
신자들 사이의 사이비 신앙 논리도 골치다. 예전엔 후보 자질과 무관하게 “장로니까 뽑자”라고 했다. 요새는 “좌파는 교회의 적”이라는 소리도 들린다. 신앙적 숙고를 방해하는 시도이자, 여호와의 궤를 내 욕망에 동원하는 신성모독이다. 물론 여기에 속을 만큼 멍청한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내가 거기에 속고 싶을 때다. 실은 세속적 공약에 끌리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명분을 세운다. 욕망을 감추는 종교적 포장이다. 이번엔 많은 목사가 그리스도인 대신 무속 신봉자를 호위한다. 종교적 수사의 공허함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조심스러워진다. 신앙의 수사 아래 숨은 정치적 속내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치적 동기의 타당성을 검증하는 일이다.
우리 삶은 언제나 정치다. 하나님이 주신 가치를 어루만지며, 최선의 사회를 만들고자 노력한다. 선거는 이런 나를 점검하는 중간고사다. 평소 나의 정치를 돌아보는 반성, 그리고 더 나은 참여를 바라는 결단의 기회다. 우리 모두에게, 현명한 선택의 시간이자 보다 깊은 숙고와 성숙이 더해지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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