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는 정치나 정치적 견해를 피력하기에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신문이나 뉴스도 거의 안 보고, 정당의 이름이나 관련 정치인의 소속 정당조차도 새까맣게 모르는 것이 나의 형편이다. 그런데 ‘정치적 견해’를 논하려니 난감하기 짝이 없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나와 같지가 않다. 정치에 빠삭한 이들(또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바짝 열을 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이들은 통상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정치적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또 단지 정보만 많이 갖춘 것이 아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적 신념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치에 해박한 그리스도인들을 부럽게 여긴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이런 정치 덕후들에 대해서 때로 안쓰런 마음을 품을 때도 있다. 왜인가?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상대방에게 은근히 강요하거나 고집스럽도록 설득 공세를 펼치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표명한다 하여, 원수처럼 여기고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을 당연시하기까지 한다.
성경의 가르침
한때 요한은 열두 제자 그룹에 속하지 않은 인물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자 그로 하여금 그런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금했다(눅 9:49).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눅 9:50)고 말씀하심으로써, 요한의 배타적 자세를 은연중에 나무라셨다. 어떤 이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다면[본질적 사안] 그가 제자들 그룹에 합류해 있느냐 아니냐[부차적 사안]에 대해서는 괘념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즉, 그리스도인끼리 본질적 사안에 있어서는 일치를 보아야 하지만 부차적 사안과 관련해서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비슷한 사고방식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도 기술되어 있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음식을 먹는 일[고기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의 문제]과 날을 지키는 일[안식일, 주일, 절기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의견이 나누어져 있었다. 이때 바울은 “어떤 사람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낫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아니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롬 14:5-6)고 말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닌(롬 14:7) 주를 위하여 사는 것[본질적 사안]이 확실하다면, 음식을 어떻게 먹든지 날을 어떻게 지키든지 하는 것[부차적 사안]은 그리스도인마다 다르게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귀에 익숙한 캐치프레이즈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본질에서는 일치(unity), 비본질에서는 다양성(diversity), 그리고 모든 일에서 사랑(charity)”이라는 캐치프레이즈이다.
정치적 견해의 성격
그렇다면 우리가 주장하고 변호하는 정치적 견해는 본질적 사안인가 비본질적 사안인가? 이것은 정치적 견해의 내용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다음의 진술을 보라.
(S1)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S2) 정치란 힘을 분배하는 기술이다.
(S3) 정치가 어지러우면 국민이 피해를 본다.
이런 내용의 정치적 견해는 누구나 동의하는 본질적 사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주장들은 어떤가?
(S4) 이승만 대통령은 국부적 존재이다.
(S5) 북한은 악의 축이다.
(S6) 새마을 운동 시절이 지금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이런 식의 정치적 견해에 대해서는 아마도 찬성부터 반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이 다투어 등장할 것이다. 그것은 이 주장들이 비본질적 사안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는 (S4)∼(S6) 같은 비본질적 사안에 목을 걸고 싸우고 흥분하고 비판과 비난을 쏘아붙이고 있다. 그것도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이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거처로 삼았다고 고백하는 이들끼리 말이다!
정치적 견해의 다양성을 받아 주는 사랑
분명코 우리의 태도와 행동거지에는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형제자매들이 나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그들의 논리와 판단에 의해 나름대로의 정치적 견해를 형성하고 주장할 자유를 허락해야 한다. 그것이 그런 형제자매들에 대한 사랑(요 13:34-35)의 실천이 아니겠는가? 만일 사도 바울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 참여한다면, “어떤 사람은 진보적/보수적 견해를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중도적 견해를 낫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진보적/보수적 견해를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중도적 견해를 고수하는 자도 주를 위하여 고수하느니라”라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저력은 정치적 견해의 획일적 통일성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 사이에 정치적 견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 용납하는 데 있다고 하겠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형제자매 사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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