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글을 부탁받고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와의 첫 만남을 되짚어봤다. 2007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게 새삼스럽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짧은 일본 생활을 거쳐 서울여대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같은 교회에 출석하던 송태현 교수님 초청으로 기독교학문연구소 소모임에서 발표를 했다. 뒤져보니 제목이 ‘텔레비전 속의 종교: 현상, 이해, 접근법’이었다.
학문하는 신앙인이기에, 더구나 ‘미디어와 종교’라는 생소한 분야를 전공하기에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신학을 배경으로 연구하는 건 아니다. 이 분야는 미디어, 그리고 종교라는 독립적으로 보이는 두 영역이 사실은 교차하는 지점이 아주 많으며, 그 교차점이 함의하는 바가 현대 사회를 설명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는 점에 천착한 미디어학의 한 분야다. 물론, 미디어학의 문법과 언어로 연구한 바를 재해석하여 그 함의를 기독교 커뮤니티에 전달하는 일 역시 내겐 중요하다.
그 인연으로 2009년부터 ‘기독미디어아카데미’에서 몇 차례 강의했고, 2012년에는 당시 월간이던 <월드뷰>에 ‘대중문화 속 가족 이야기’를 10회 연재하기도 했다. 2015년부터 3년간, 2019년부터 지금까지는 실행위원, 또 <신앙과 삶>이 창간된 2019년 7월부터는 편집위원의 자리를 맡고 있다.
그전부터 기독교 세계관 운동 자체에 관심을 두었던 건 아니다. 90학번으로 교회 대학부 중심의 신앙생활을 했던 터라,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접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일부러 찾아서 공부할 만큼 부지런하지도 못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의 무게가 선배들한테만큼 무겁지 않다. 기독 지성 사역의 방법론 중 하나라는 생각이 강하다. 솔직한 고백이다. 그래서 죄송한 마음이 크다. 80년대 초반부터 선배들이 눈물과 기도로 이뤄놓으신 것에 뒤늦게 무임승차 한 데서 오는 감정일 테다. 세계관 운동의 1세대와 2세대의 헌신과 열정을 감히 흉내도 내지 못하는 뒷세대의 한결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동시에 투정도 하고 싶다. 90년대 학번 이후 세대가 여전히 이곳을 내 집처럼 여기지 않는 이유를 혹시 나의 게으름이나 무지 밖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마음에서다. 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언제부턴가 세대의 단절을 염려하게 됐을까? 왜 후속 세대의 마음을 사는 게 이리도 힘들까? 동역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담을 수 있는 지면임에 기대어 어쭙잖은 생각을 적어본다.
나는 그 답을 동역회와 관련한 논란의 순간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2000년대 초반 소위 ‘기세논쟁’과 2010년대 후반 <월드뷰> 분리가 그것이다. 서로 다른 원인과 맥락의 일들이지만, 모두 사회적 현실에 대한 동역회의 입장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현실에 접근하고 대응하는 동역회의 방식에 대한 바깥으로부터의 질책이 중심에 있었다. 한발 물러나 보면, 동역회는 한국 사회나 교인들이 현실에 관하여 제기하는 여러 질문에 답해야 할 위치에 있음을 확인해 준 경험이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 요청된 몫이었다.
만약 그것이 동역회의 소임임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현실과 끈질긴 씨름을 놓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한국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 그 속에서 한국교회의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또, 되묻는 것이다. 설령 여러 현실적 한계로 각 쟁점에 대한 답을 순발력 있게 내놓지는 못한다 해도, 의미 있는 문제제기를 함으로써 쟁점의 본질을 꿰뚫고 성찰케 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코로나 19’ 국면에서 한국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회의가 두드러질 무렵 <신앙과 삶>이 ‘시민으로서의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존재를 묻다’를 특집 주제로 다룬 건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더 많은 현안, 더 민감한 현안들이 남아 있다.
더불어 잊지 말아야 할 건, 현실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답변은 하나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신앙하는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유한한 인간이 이를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그 절대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해석과 관점만이 존재할 뿐이다. 복음주의 정신과 전통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동역회의 역할이 그 다양한 해석과 ‘관’을 끄집어내고, 이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고민에 교회와 교인들이 함께 참여하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신앙과 삶> 창간호에서 손봉호 명예 이사장님은 이렇게 정리하신 바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것이다 하고 지적할 수 있도록 형성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적어도 당분간은 이념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펼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미 잘 정리되어 있는 세계관을 확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에 어긋난 것이 무언인가를 찾아내고 비판하고 회피하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망설임과 유예를 최소화하는 것. 그래서 <신앙과 학문>, <신앙과 삶>, 학술대회 등 여러 통로를 통해 현안에 대한 ‘기독교 입장’의 독점을 막아내고 다양한 스펙트럼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 공정, 젠더, 이슬람, 통일 등 산적한 쟁점과 사회적 의제를 목전에 둔 한국 사회에서 동역회가 감당할 몫은 아닐까. 죄송함과 투정 사이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질 동역회를 소망하며 건네는 졸견이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