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21년 12월 마지막 주, 필자는 한 해를 마무리하며 제주도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마침 같은 연구소에 다니는 동료 부부도 제주도에서 여행 중이라 함께 식사 교제를 했다. 대화하면서 자연스럽게 온라인 예배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결혼한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은 부부는 아직 교회를 정하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온라인 예배를 통해서 설교에 대한 대화를 풍성히 가질 수 있게 되어 좋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게 되면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강대상에서 장로였던 이명박 전(前) 대통령의 치적을 끊임없이 찬양하며 그분의 정치적 잘못은 사랑으로 덮어주자고 강조하는 담임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부모님의 신앙 아래에서 별수 없이 그 교회에 출석했지만, 독립 후에는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 신앙적 방황을 했다고 전했다. 그러다가 필자의 연구소 동료인을 아내로 만나고 나서, “정치적인 견해가 없는 설교를 다섯 개만 뽑아주고 내가 그것을 들었을 때 수긍할 수 있으면 같이 교회를 다니겠다”라는 선언을 했으며, 마침내 설교를 듣고 설득되어 비록 아직 교회를 정하진 못했으나 다시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2022년 새해 첫날, 장인어른과 식사를 하게 되었다. 장인어른은 요즘 유튜브로 많은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어 참 좋다고 하시면서 교계에 이름 있는 몇몇 목회자들의 설교를 권하셨다. 이에 아내도 최근 듣고 있는 설교가들을 이야기했는데, 장인어른은 이 중 한 분에 대해서 “그 목사는 좌파 목사야!”라고 비판하셨다. 알고 보니 이름이 비슷했던 서로 다른 목회자로 인한 해프닝이었다. 장인어른이 ‘좌파’라고 언급한 목회자는 나도 알만한 교계 내에 이름 있는 분이었으나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다. 식사 후, 내가 ‘좌파목사 XXX’이라고 인터넷 검색을 하자 놀랍게도 많은 글이 검색되었다. 시간을 들여 꽤 많은 수의 글을 읽어보았지만, 신학적 지식이 짧아서인지 기사를 읽는 독해력이 부족해서인지 이유를 납득하기란 어려웠다.
나는 이런 ‘강대상에서 목회자의 정치적 이슈에 대한 언급’이나 ‘믿는 사람이 정치적인 신념을 가지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행동이나 생각이 정치적이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 영역 역시 창조세계의 하나로 하나님의 질서를 그 안에 세우기 위해 성도들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 사이에 두 일화를겪으면서 나는 어딘가 모르게 씁쓸함을 느꼈다.
교회에선 가르침을 주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구도가 너무나 쉽게 발생하고 이것을 깨뜨리기가 너무나 어렵다. 그렇기에 본인의 정치적인 판단을 교조적으로 가르치게 되기 쉽다.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이기에 정치적 이야기는 정치적 주장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요즘은 직장에서조차 아무리 높은 사람일지언정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은 세상이다. 하지만 교회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교회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가 올 것만 같다”라며 도망가 버리는 청년들이 많다.
이러한 문제는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온라인에선 다들 ‘키보드 전사’(keyboard worrier)가 되지만 현실에서는 어디서도 허심탄회하게 정치 이야기를 하지 못한다. 조금만 정치적 견해를 밝혀도 좌파 혹은 우파로 낙인찍혀 극단주의자로 취급받곤 한다. 그렇기에 교회야말로 정치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는 장이 되어야겠지만, 교회 역시 ‘완장질’과 ‘프레이밍 씌우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다른 곳에는 있는 최소한의 예의조차 없을 때가 많다. 이러한 대화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면 불성실한 혹은 성화(聖化)가 덜된 청년이라는 누명까지 써야 하는 곳이 교회이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청년들은 투표하지 않는 세대였지만, 이제는 기성세대만큼이나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교회만 오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된다. 그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때 큰 인기몰이를 했던 책, <90년대 생이 온다>에서 저자 임홍택은 90년대생은 일터에서도 즐거움을 추구하는 세대라고 말한다. 일터에서조차 즐거움을 추구하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조차 입 다물고 듣게만 만드는 엄청난 곳이 교회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도 즐거울 순 없을까?
나의 짧은 경험과 학식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나 역시 교회 안에서 정치 이야기는 꿈도 꾸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이렇게 입 닫고 살기에는 한국 교회 안에서 살아야 할 날들이 너무 많이 남은 것 같다. 더욱이 기다리고 침묵하면서 버티다간 함께 이야기할 우리의 동료들이 결국 하나둘 곁을 떠나고 없어질지도 모른다. 기다림이 좋은 대안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결국 용기 있게 교회 안에서 부딪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는 수 밖에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을 부탁한 <신앙과 삶> 편집자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정치적 판단을 내립시다”라는 거창한 구호가 가득한 글을 써주길 기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의 독자 대부분이 기성세대인 것을 알면서 이렇게 필자도 용기 내지 않는가? 다음은 당신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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