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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로 인한 피해가 우리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김상진의 개인전은 위태로운 삶의 현주소를 파고든다. 전시장은 강의실로 꾸며져 있고 거기에는 빈 의자와 책상이 덩그마니 놓여있을 뿐 정작 주인공이 되어야 할 학생들은 천정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그림 1)
김성진, 올해의 작가상 2021,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장면
전시장 한구석에는 한 남성이 우리에 갇혀 잔뜩 긴장한 채 앉아 있고 강의실 건너편에는 “I will disappear”라는 문구가 현실에 대한 두려움을 보여준다. 전시장에 흐르는 느리고 음울한 사운드는 ‘코로나 19’의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켜준다. 김상진의 작품은 시대를 투영하는 작가정신을,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비장함마저 느껴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성찰해볼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이 그 누구와도 분리될 수 없으며 우리의 눈높이에서 동시대 동료들이 살아가는 것을 표상하기도 하지만 어떠한 경우도 소망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소망을 포기하는 사이 삶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명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생명을 존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을 섬긴다는 뜻이고 각종 피조 세계를 사랑으로 돌본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을 보는 동시에 그들을 비추는 희망의 섬광도 함께 볼 수 있어야 하며 작가는 이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미국의 기독교 화가이자 이론가인 마코토 후지무라(Makoto Fujimura)가 문화를 돌보는 일이란 소외와 고통, 억압에 관한 진실에 대해 말하면서 그와 함께 ‘소망과 회복’에 관한 진리를 말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라고 피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샬롬의 문화를 형성하는 데 앞장설 책임을 지닌다. 샬롬의 문화는 샬롬의 비전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아름다움과 선함, 질서와 조화, 풍성함과 풍요로움, 온전함, 기쁨의 비전에 가깝다.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 이것은 창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샬롬이 구체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 즉 공감을 통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샬롬은 타인을 향한 시선과 맞닿아 있다. 씨에스 루이스(C.S. Lewis)가 말했듯이 성찬을 빼놓고는 우리의 눈에 보이는 가장 거룩한 대상은 바로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런 예는 종종 전시행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영국의 클레어 패티(Clare Patey)는 “내 신발을 신고 1마일만 걸어봐”라는 이색적인 퍼포먼스를 펼쳤다.(그림 2)
클레어 패티, 내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걸어봐,런던의 공감미술관
방문객들은 미술관 컬렉션에 소장된 다른 사람의 신발을 신고 1마일을 걷게 된다. 걷는 동안 헤드폰을 통해 신발 주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들은 순조로웠던 결혼생활이 난관에 부딪힌 남성의 이야기, 교도소에 있는 동안 예술에 심취하여 예술가의 삶을 살게 된 화물 자동차 운전사의 이야기, 졸지에 노숙자가 된 이야기 등을 듣게 된다. 참여자의 소감이다. “걷는 동안 신고 있던 신발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신발 주인과 이상할 정도로 일체감이 들었습니다. 정말 강렬한 느낌이었죠.”
공감을 매개로 하는 작가들이야말로 갈등과 투쟁이 그치지 않는 이 땅에 평화와 사랑이라는 멋진 회랑을 세우는 첫걸음이 되지 않을까? “상상력을 발휘할 공감이 없다면, 세상을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 이 능력 없이는 다정한 연인도, 뛰어난 예술가도, 훌륭한 정치인도 되지 못한다. 사랑이 넘치는 폭군이 있다면 말해보라.”(Julian Barnes).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을 좀더 이해하게 되고 조화로운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이의 긴장감 때문에 딜레마에 빠질 때도 있다. 우리는 사회생활의 상황과 하나님의 소명 사이에 긴장에 붙들려 고민하고 때로는 갈등을 겪게 된다. 그럼에도 세상에 속해있는 기독교 예술가의 삶에는 무언가 구분 점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의 제언은 새겨들을만하다. 그는 “기독교적 차이는.....뭔가 새로운 것을 밖으로부터 낡은 것 속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낡은 것의 적절한 공간 안에서 정교하게 새로운 것을 분출시키는 것이다.” 볼프는 이것을 ‘부드러운 차이’(soft Difference)라고 불렀는데 기독교적 존재의 목적은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이다.”(벧전 2:9). 상한 문화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거나 두려움과 의심의 세상에 희망과 신뢰를 선포하는 일, 돈과 권력과 섹스가 규범으로 뿌리내린 세상에 구속적인 사랑을 선포하는 일 등이야말로 창조적 청지기의 몫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이 문화에 참여할 때 고려해야 할 점은 거룩하거나 속된 예술을 따로 만드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의 무대는 넓고 크다. 우리를 기다리는 장소, 사람이 있기에 기대를 품게 한다. 지난 세기의 예술가들이 사회 내에서 비참함과 허무와 모순을 드러내는 역할을 충실히 했다면, 오늘의 예술가들은 회복과 재결속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정말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가야 할 것이다. 예술에 참여하는 주체들이 메마른 문화의 토양 위에서 선하고 참되며 아름다운 것을 길어낼 것을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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