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교회, 예수 이야기에 충실한 종말론적 혁명 공동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 스탠리 하우어워스 & 윌리엄 윌리몬 / 김기철 역 / 복있는사람 / 2008.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교회의 본질은 무엇일까?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 1940~ )와 윌리엄 윌리몬(William Willimon, 1946~ )이 저술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복있는사람, 2008; 개정판, 2018)에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성찰과 비전이 담겨있다. 하우어워스는 노틀담 대학교를 거쳐 듀크 대학교에서 은퇴할 때까지 신학과 윤리학을 가르쳤으며, 현재 듀크 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저술과 강연을 이어가고 있다. 윌리몬은 듀크 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실천신학 교수 겸 교목실장으로 활동했고 미국 연합감리교회 감독을 역임했다. 총 7장으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은 ‘하늘나라의 식민지’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나그네 된 거류민’으로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하우어워스는 기독교 신앙의 전통과 성경적 서사를 강조하는 후기자유주의 입장의 예일 학파에 속하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1927~1997),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 1929~ ) 등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하우어워스는 예수 이야기와 기독교 공동체주의를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예수 이야기를 전해 들음으로써 죄인임을 깨닫고 구원을 경험하며, 제자 공동체로의 모험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또한 하나님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서의 덕과 성품에 관심을 가지며, 비폭력 평화주의로 하나님 나라 신학을 형성해왔다. 하우어워스의 이러한 사상적 바탕은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에도 고스란히 작동하는데, 특히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이야기에 충실한 교회가 세상에 대한 대조사회로서 지닌 항구한 역사성과 확고한 가시성을 입증하고자 노력한다.
먼저 저자들은 주류 기독교가 국가 권력과 결탁하고 구조적 폭력을 용인하면서 기득권을 지탱해온 ‘콘스탄티누스주의’를 고발한다. 특히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 1894~1962)가 저술한 <그리스도와 문화>(IVP)를 강한 어조로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 행위의 통일성을 내세워 그리스도인들에게 문화와 정치를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사회 전략을 승인해 주는 결과”(64면)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요더는 ‘행동주의 교회’, ‘회심주의 교회’, ‘고백 교회’로 교회의 유형을 구분한다. 그 유형들 중에서, 저자들은 복음이 결핍된 세속적 낙관주의로 사회를 변혁하려는 ‘행동주의 교회’나 개인의 내적 변화에만 치중하는 ‘회심주의 교회’를 거부하고, 효율성이 아닌 신실함으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대항 문화적인 ‘고백 교회’를 지지한다.
또한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체계라는 ‘계몽주의’가 신앙을 관념적인 사유로 추상화한 것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저자들은 사회 윤리가 ‘고립된 영웅적 자아’(홀로 결단하고 선택하는 개인)를 전제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뿐만 아니라 ‘개인주의’가 복음을 사사화(私事化)하면서 신앙의 공적 역할을 상실했으며 교회의 공동체성을 약화했다고 폭로한다. 이에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윤리적 단위”(119면)는 고립된 자아가 아니라 교회라고 역설하며, 예수 이야기를 전달하는 성품 공동체가 선교적 교회의 존재 방식이자 세상과 구별된 삶의 양식이라고 말한다. 더불어 “팔복은 명령법이 아닌 직설법”(122면)이며, 산상설교는 하나님 나라의 헌장을 ‘행함’(doing)의 문제 이전에 ‘봄’(seeing)의 방식이라고 설파한다. 다시 말해, 산상설교는 “종말론적인 메시아 공동체”(132면)로서의 교회가 걸어가야 할 제자도라는 진리의 길을 보여주고, 종착지를 세상과 다르게 해석하도록 안내하며, 불의한 현실에 맞서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릴 수 있는(갈 5:5) 담대함을 허락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과제는 세상을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세우는 것”(60-61쪽)이라는 관점으로 교회의 독특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세속 학문과 현실 사회를 제한하는 모습, 그리고 교회가 공론장에서 시민사회와의 대화와 협력으로 세상을 돌보려는 시도를 타협과 순응이라고 비판하는 모습은 저자들에게 ‘분파주의’(sectarianism)라는 오명을 씌우게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화해하시는 방법은 바로 성육신 사건이다. 따라서 초월적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와 현실 사회에서 내재적으로 활동하시는 것처럼, 교회도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새 시대를 낳는 탄식을 내뱉으며, 이웃과 공동체의 슬픔을 기쁨으로, 아픔과 고통을 위로로 바꾸는 복음의 공공선을 이뤄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가 부재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혼돈의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변증이 예수를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복음을 일련의 신념 체계로 축소해버렸다는 점에서, ‘교회다움’이라는 간절한 외침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절망의 사사시대 한복판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룻을 통해 희망의 역사를 이어 가셨듯이, 오늘날 교회도 고유하고 낯선 방식으로 “새로운 표징을 이 세상 속에 드러내는데”(122면) 그 목적을 두고, “세상이 자기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대안적인 사회”(35면)로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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