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나와 웨슬리 선교사님의 만남은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주일날 학교 주차장에 중년의 조그마한 미국인이 “당신은 한국인인가요?”라고 묻기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요?”라고 다시 물었고, 또 “그렇습니다”라고 한 대답으로 우리 만남은 시작되었다.
미국 군대 소속으로 한국에 처음 와서, 청계천 복개공사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광주 기독병원, 창조과학회로 이어졌고, 웨슬리 선교사님이 부친의 건강 악화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부친의 전도를 위해 미국으로 귀국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신앙의 본질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졌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있는가? 당신이 믿는 예수님은 누구인가? 당신에게 예수님은 어떤 의미인가?” 수많은 질문 후에 웨슬리의 그 유명한 책 장사가 시작되었다. 두툼한 가방 속에는 많은 책이 있었다. 나의 지적 수준이 낮음을 간파한 웨슬리 선교사님은 세 권을 추천하였고, 그중에 파커(Parker)의 책은 무료로 주고, 나머지 두 권은 강매당했다(강매당했기에 저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웨슬리 선교사님과의 만남을 평생 이어갈 수 있게 만든 조그마한 ‘소책자’(booklet)를 받았는데 그 소책자의 발행자는 생각나지 않지만, 선교사님의 삶에 대한 연세대 수학과 교수님의 ‘내 친구 원이삼을 생각하며’라는 글이 들어 있었다. 그 교수님은 평생 친구인 웨슬리 선교사님이 미국에 영주 귀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삶을 반추하여 친구를 기리는 글을 썼다.
그 내용을 읽자마자 가슴이 찡했다. 웨슬리 선교사님과의 처음 만남, 일관되고 헌신하는 삶, 한국과 예수님에 대한 그의 사랑, 구두쇠지만 사랑이 많은 청교도, 마지막으로 한국을 떠나는 날, 공항에 가면서 자기가 먹고 남은 땅콩을 봉지에 싸서 전해 주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의 삶을 회상하는 그 글은 내 마음에 너무 깊게 남았다.
올해로 웨슬리 선교사님을 알게 된 지 38년이다. 세월이 많이 지나 나도 노년이 되었다. 그 오랜 시간에도 웨슬리 선교사님은 변함없이 구두쇠이고 고집쟁이고 남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 영감탱이이다. 그러나 그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끊임없이 사색하고, 끊임없이 기독교 정신 아래서 학교를 세우려고 하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인 관계망을 위해 일한다. 그 모든 것을 자비량 선교사로 말이다.
내가 재정 지원을 제안할 때마다 그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사도 바울이 자비량(tentmaker)으로 산 것과 같이 그는 한국에서 자비량 선교사로 남에게 단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고집쟁이 선교사이다. 누렇게 때가 묻은 잠바, 20년간 한결같이 입고 다니는 남방, 낡은 구두, 여전히 못 하는 한국말, 그렇다고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 반평생을 넘게 보와 왔는데 일관성에는 세계에서 5위안에 들어갈 듯싶다.
3년 전 웨슬리 선교사님이 심하게 병을 앓아 병원에 몇 개월을 입원해 있었다. 많은 지인들이 건강을 심히 걱정하고 있을 그때, 선교사님은 병원에서 유언을 작성하고 있었다. 전 재산을 한국의 여러 기독교 단체, 학교, 학생들에게 기부한다는 유언장을 만들었는데 그중에 일부는 자기의 장례비를 위해 남겨 놓았다. 유언장을 보고 마음이 몹시 미어진 내가 이렇게 이야기했다. “당신을 위해서도 좀 쓰고, 장례위원장은 내가 할 터이니 장례비 걱정하지 말고 옷 좀 사 입으시고, 구질구질하게 다니지 마세요”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내 마음은 슬프면서 천국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삶에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인인 웨슬리 선교사님은 지난 47년간 매년 비자를 연장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직장을 통한 비자 연장 절차는 너무 복잡하고 그 방법 또한 선교사님이 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다. 비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웨슬리 선교사님은 미국으로 영주 귀국한다는 결정을 하였고, 이 사실을 안 많은 사람의 마음은 불편했다. 그리고 그의 사랑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지 못한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평생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많은 기독교 후학을 양성한 진정한 한국인이 한국 비자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때마침 수백 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특별기여자’ 제도로 장기 체류자격을 획득하였는데, 그 사람들보다 훨씬 공헌도가 큰 웨슬리 선교사님이 그런 자격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도를 알아보았고, ‘특별공로자’에게 국적을 수여하는 제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국회 외교위원장, 외교부 제2차관, 법무부 국적과 사무관과 여러 분들이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 우리의 취지를 이해하고 도와주었다. 그 결과 웨슬리 선교사님은 대한민국 건국 후 10번째 특별공로자로 마침내 한국 국적을 얻게 되었다. 한국인 웨슬리, 이제는 국민의료보험 혜택이 가능하고 지하철도 무료로 탈 수 있다.
웨슬리 선교사님의 대한민국 국적 획득을 위한 탄원서에는 단 10일 만에 1000명 이상이 참여하여 주셨다. 인생의 현재는 과거의 적분 값이라는 것을 이번 과정을 통해 느꼈다. 그리고 그동안 내 마음에 있던 웨슬리 선교사님에 대한 빚도 약간은 탕감받았다. 인생의 후반부에서 웨슬리 선교사님을 보면서 나는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의 상의 큼이라”(마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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