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지난 2월 16일 필자는 웨슬리 선교사님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선교사님은 가끔 이메일을 보내주시지만 대부분 여러 사람에게 보내는 공지형 이메일이기 때문에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번에는 개인 이메일을 보내주셨다. 읽어보니 지난번에 선교사님이 필자를 위해 일 년 회비를 지불하고 ‘미국기독과학자협회’(ASA) 회원권을 선물했는데 받았느냐는 것이었다. 아차 싶어서 이전 이메일을 뒤져보니 1월 5일에 개인적으로 보낸 선교사님의 이메일이 있었다. 연초의 많은 이메일 속에 묻혀있어서 미처 못 본 것이었다.
1980년, 필자가 박사과정 학생 시절에 처음 만난 이후 웨슬리 선교사님은 늘 이렇게 ‘멘토링’하셨다. 멘토링을 하신다고 해도 자주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계시다가 이 사람에게 필요하겠다 싶은 소식이나 책, 논문, 기사 등이 있으면 불쑥 링크나 파일을 보내신다. 이런 방식으로 선교사님은 생짜배기 필자를 그리스도인 학자로 다듬어 가셨다. 필자가 학생 시절부터 참여했던 창조과학 운동의 문제점을 깨닫고 돌이키게 된 것도 상당 부분 선교사님의 덕이었다. 1981년에 기독교대학설립동역자회(現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시작한 것도, 1988년에 <통합연구>를 창간한 것도, 1997년에 VIEW(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를 설립한 것도 선교사님의 직간접적인 영향 때문이었다. 아직도 ‘공사 중’이기는 하지만 필자는 선교사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란 말을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붙일 수 있는 학생으로, 학자로, 지금은 대학행정가로 다듬어져 가고 있다.
처음 선교사님을 만난 후 42년의 긴 세월 동안 필자는 한국에서, 유럽으로, 미국으로, 캐나다로, 지금은 아프리카 오지에 머물고 있지만 선교사님은 한결같이 그곳에 계셨다. 어디를 가든 필자의 요청과는 무관하게 선교사님은 늘 ‘옆에’ 계셨다. 오래전 필자가 시카고에 머물 때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필자가 피츠버그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주선하신 적도 있다. 필자가 밴쿠버에 있을 때는 한국에서 필자의 이웃에 있는 캐나다인 그리스도인 학자를 소개하시기도 했다.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시편 기자의 말이 생각난다. “내가 선교사님을 떠나 어디로 가며 선교사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처음에는 편지와 전화로, 그리고 근래에는 이메일로, 일상에 묻혀 그리스도인 학자로서의 정체성이 희미해질 때마다 선교사님은 한결같이 필자의 옆구리를 찌르셨다.
처음 만났을 때 선교사님은 45세의 청년이었고, 필자는 25세의 더 젊은 청년이었다. 둘 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었다. 그 후 필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세상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선교사님은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그곳에 계셨다. 그 사이 필자의 영어가 좀 늘었지만, 선교사님의 한국말은 별로 늘지 않으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불편한 한국말로 선교사님은 대부분 먼저 필자에게 연락하셨다. 필자가 한국에 들를 때는 필자의 한국어 동역 서신을 통해 필자의 동선을 상세히 파악하신 후에 만나기를 먼저 요청하셨다. 한국어가 능치 않으신 분이 어떻게 동역 서신을 그렇게 자세히 아실까? 선교사님의 신학으로 미루어 오순절 방언이 터진 것 같지는 않고 구글 번역기의 덕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선교사님은 필자가 연락드린 것보다 몇 배를 더 많이 연락하셨다. 마치 80대 부모님이 60대 자녀를 챙기고 염려하시는 것처럼,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그분의 한결같음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혼자만의 생각일까?
그 한결같은 선교사님이 지난 2월 24일 특별공로자로 인정되어 한국 국적을 취득하셨다. 당일 과천 정부 청사에서 법무부 장관이 직접 시민권을 수여했다고 한다. 한국에 오신지 57년이 지난 후에 선교사님은 드디어 법적으로 한국인이 되셨다. 이것 역시 선교사님의 한결같음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선교사님은 42년을 한국에 살았던 필자보다 훨씬 더 오래 한국에 사셨고, 한국을 위해 헌신하셨다. 귀한 분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아울러 선교사님의 국적취득을 위해 수고하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대한민국 국적취득 축하를 위해 2월 20일 주일 아침에 선교사님과 온라인(Zoom) 미팅을 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을 삼 년째 가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선교사님은 많이 노쇠하셨지만 그래도 그 깐깐함은 그대로였다. 필자가 5월에 귀국하면 뵙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자신은 5월에 미국 여행을 할 예정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귀국 후에 뵈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이번에 미국 가면 그곳에서 자기 삶을 마감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셨다. 고향인 앰허스트를 비롯하여 미시간, 델라웨어, 린치버그, 블랙 마운틴, 차타누가 등을 방문해서 오랜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셨다. 고향에는 자기의 장례를 부탁할 수 있는 정도의 가까운 친척이 없기에 결국 미시간에서 화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하셨다. 마치 남 얘기하듯이, 먼 길을 떠나시는 분처럼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평생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셨던 선교사님다운 마지막 준비였다. 선교사님의 건강으로 봐서 한국 국적은 물론 이 땅에서의 시민권도 오래 유지하실 것 같지 않다. 다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이 귀한 분이 천국으로 떠나시기 전에 잠시라도 뵙고 그 한결같음의 뒷얘기들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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