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내가 웨슬리 웬트워스를 처음 만난 것은 총신대 4학년 때인 1981년이었다. 에인트호벤 공대의 기독교 철학 교수였던 에히베르트 스훌만이 총신대에 와서 인공지능(A.I.)을 포함한 컴퓨터 기술에 대한 기독교 철학적 평가를 강의했다. 한국에 와서 7~8개의 주제로 강의한 교안을 뒤에 받아서 읽어 보았다. 당시 학생들은 아직 타자로 리포트를 치던 시대였다. 내가 XT 컴퓨터로 작업을 시작한 것이 대학 졸업 이후였다. 그런데 스훌만 교수는 그때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와 인간 두뇌의 관계, “인격이 정보의 축적인가?” 같은 철학적 문제들과 씨름하고 있었다. 앞서도 한참 앞서 있었다.
그 자리에 남루한 옷차림의 미국인 한 사람이 동행했다. 역시 그날의 강의와 관련된 영어 원서와 기독교 세계관에 관한 책들을 가지고 와서 책 좌판을 벌여 놓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가 나를 웨슬리에게 소개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와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웨슬리는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대학교 3학년 때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철학 입문서인 깔스베이끄(L. Kalsbeek)의 <Contours of Christian Philosophy>를 한국어로 번역했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 총신대 강의를 그만두신 손봉호 선생님이 총신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사당동 꼭대기에 작은 집을 짓고 살고 계셔서 수시로 찾아가 책 번역과 관련된 조언을 받았다.
그리고 네덜란드 유학을 준비하던 나는 도예베르트의 철학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고, 그것을 연구하고 한국에 소개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웨슬리는 그 생각을 당장 여기서도 펼 수 있으니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관심을 가진 대학원생들과 각각의 학문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웨슬리와 함께 처음 시작한 스터디 그룹을 지금 기억나는 대로 열거하면, 당시 홍릉의 카이스트(KAIST)에서 과학과 기독교에 관한 공부를 거의 매주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영문학과 기독교, 교육학과 기독교, 예술과 기독교, 경제학과 기독교, 역사와 기독교 등의 이름으로 스터디 그룹을 조직하여 책을 읽고 토론했다.
당시 이화여대 사범대학의 정확실 교수 연구실은 교육학과 기독교를 공부하던 작은 센터였다. 아름다운 교정과 담쟁이 넝쿨로 감싸인 고즈넉한 건물의 연구실, 거기서 나누었던 토론은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홍릉 카이스트에서 가졌던 과학과 기독교 스터디 그룹은 웨슬리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분야였다. 자신이 엔지니어였을 뿐만 아니라, 그 주제의 사회적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었던 양승훈 교수가 주축이었다. 거의 매주 모였고 꽤 오랫동안 모임이 있었다. 그러던 중, 그 모임에서 기독교 대학 설립을 추진하자는 말들이 오가기 시작했다. 웨슬리와 나를 포함한 당시 주축 구성원들은 기독교 대학 설립에 회의적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독교 대학이라면 기독교적인 철학과 원리 위에서 제반 학문을 가르쳐서 기독교적 사상으로 준비된 시민을 배출해야 하고, 그러려면 그런 교과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진이 필요한데, 한국에는 아직 그러한 준비가 된 교수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카이스트 모임과 의견이 달랐던 또 다른 주제는 창조과학과 관련된 문제였다. 나는 기독교 철학적으로 반성해 보았을 때 창조과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모순이라고 보았다. 창조는 이미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았던 것이다. 창조가 사실이기는 하지만 모든 사실이 과학적 사실은 아니다. 그 점에서도 초기 스터디 그룹의 중심 멤버들과 카이스트의 구성원들은 견해를 달리했다. 지속적인 토론을 벌이던 중 결국 모임을 분리하기로 했다. 카이스트 구성원들은 창조과학회 활동을 하면서 기독교 대학 설립을 추진하기로 하고, 스터디 그룹은 계속해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활동을 계속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기독교대학설립 동역회’와 ‘기독교학문연구회’는 다시 합쳐서 현재 하나의 기관이 되었다. 갈라지고 다시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사의 한 부분이다.
그 이외에도 스터디 그룹에 참여하는 회원들이 기꺼이 자기 집을 개방하여 공부를 위한 장소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일일이 이름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분들이 거기에 참여했다. 웨슬리는 거의 모든 모임에 참여하셨다. 카이스트 모임 이외의 모임들은 거의 격주로 모인 것 같고, 웨슬리와 나는 매주 2~3개 혹은 3~4개의 모임에 참여했다. 한국어가 서툰 웨슬리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토론에 열심히 참여하셔서 나름 무엇인가를 계속 열심히 하고 계셨다.
그렇게 해서 기독교학문연구회가 시작되었다. 그때 함께 공부하던 많은 분들이 지금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시니어 회원이 되었고, 많은 신진 학자들이 지금 주축이 되어 모임을 이끌고 있다. 그 모든 이들은 ‘웨슬리 키드’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웨슬리는 지금도 남루한 옷에 노구를 이끌고 자주 기독교와 학문 관련 자료를 이메일로 보내면서 사람을 들볶고(?) 있다. 그에게 들볶이던 지난날은 즐거운 추억이다. 많은 분이 이 추억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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