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1967년이고, 웨슬리 선생님이 한국에 오신 것이 1965년이니 그분은 나보다 한국 땅에 더 오래 사셨다. 하지만 선생님의 존재감은 졸업 후 IVF(한국기독학생회) 간사가 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대학생 시절 우연히 접한 IVF에서는 신입생 시절부터 책을 읽게 했고, 첫 여름방학에는 기독교 세계관 스터디 모임이 열려 나도 참여했다. 그 뒤로 책을 읽히고 권하고 구입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대학생 시절을 보냈다. 1학년 1학기 소그룹 리더는 내게 본회퍼(Bonhoeffer)의 글을 복사해서 읽게 했고, 무슨 소린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만 남아 있지만, 그렇게 존 스토트(John Stott),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 로이드 존스(Lloyd Jones),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니컬러스 월터스토프(Nicholas Paul Wolterstorff) 등의 저자를 접하며 대학 생활을 했다. 캠퍼스에서는 <사랑의 띠>라는 자체 회지가 활발하게 발행되고 있어, 글을 쓰고 고치고 나름 출판하는 분위기도 경험했다.
당시 내가 다닌 교회에서는 이런 기독교적 사고 훈련을 전혀 제공하지 않았다. 철저한 이원론 신앙을 가진 채 대학생이 되었고, 신입생 시절 식목일 즈음 주말에 IVF 봄 수련회를 갔을 때 특강 주제가 ‘그리스도인의 이성 교제’라서, 속으로 “이성 교제 같은 세속적인 주제를 왜 그리스도인 수련회에서 다루는 걸까?”라고 의아했던 기억도 있다. 내게 신앙은 삶의 여러 영역 중 한 부분으로 철저히 분리되어 있어서, 특별히 지적인 고민과 연결되지 않은 별개의 세상이었다.
간사가 되고 나서 IVF 사무실에 가면 벽안(碧眼)의 외국인 한 분을 간혹 볼 수 있었다. 어떤 분인지 신분을 알게는 됐지만, 그분과 대화하고 교제할 기회는 별로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 IVF 간사 일을 중단하고 미국의 리폼드 신학교로 유학길에 오르기 전 웨슬리 선생님을 집으로 초대해 많은 대화를 할 기회가 생겼다. 당시 유아였던 우리 첫째와의 만남도 그렇게 이어졌고, 선생님은 여전히 우리집 아이들의 안부와 진로 선택의 고민, 그리고 생각하고 있는 관심사에 대해 질문하시고 챙기신다.
선생님은 토목공학을 공부하던 학부생 시절 버지니아 공대에서 IVF 활동을 하셨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새어머니 밑에서 컸기에 다정다감한 관계를 맺는 일이나 표현하는 것에는 서툴지만, 뭐든 삶에 익힌 철학과 원리는 중심에 간직하고 일관되게 사셨다.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예배하고 경험한 하나님 때문에, 그는 자기 삶을 그분을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분명했고, IVF 모임에서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하며 해외에서 주를 위해 사는 삶에 대한 소망도 생겼다. 졸업 후 취업한 회사에서 마침 한국에서 근무할 사람을 찾기에 주저 없이 자원해 한국에 오셨다. 그게 1965년이다.
사람의 눈에는 관심사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른 법이다. 웨슬리 선생님의 눈에는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에게 기독교적 사고의 훈련이 부족해 보였다. 그래서 한국 교회의 ‘기독교 지성 운동’의 1세대 선배들로 불리는 분들을 만나 책도 권하시고 어렵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시며 그들의 진로 선택과 생각의 지도를 만드는 일을 하셨다. 한편, 본인이 IVF 활동을 하셨고 문서 사역이 갖는 의미를 아셨기에 IVF가 한국에서 출범하도록 산파 역할을 하셨고, 기독교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는 분위기가 IVF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역할을 하셨다. 내가 캠퍼스에서 경험했던 자연스러운 문서 운동은 선생님의 평생 헌신에 크게 힘입은 것임을 지금에는 명확히 보고 있다. 한 사람의 영향력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고 심대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내가 선생님과 나눈 뜻깊은 추억 중 하나는 내 소아마비 수술을 집도한 의사인 스탠 토플(Stan Topple) 박사를 다시 만나게 해준 기억이다. 토플 박사는 애양원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고 소아마비로 장애를 얻은 환자들을 수술하는 일을 하셨다. 나는 생후 9개월 얻은 소아마비로 인해 왼쪽 다리에 장애를 얻었고, 그 장애를 개선하는 수술을 중학교 1학년 때 애양원에서 받았다. 그때 집도의가 토플 박사였다. 그 후 전혀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 2009년 애양원 100주년 행사 참석차 방한하신 토플 박사를 웨슬리 선생이 연결해주어 29년 만에 다시 만났다. 토플 박사도 학생 시절 IVF 활동을 하셨기에, 자신이 오래전 수술한 학생이 IVF 간사가 되어 섬긴다는 소식에 무척 감개무량해 하셨다.
한 인생의 형성기인 대학생 시절, 그들의 삶에 필요한 자양분과 영향력은 인생의 방향과 내용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학부생 시절 IVF 활동을 하면서 하나님을 즐겁게 알아갔고 인생의 꿈을 키워간 웨슬리 선생님의 한국행은 순수하고 소박한 개인의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독교적 사고력에 대한 관심사와 일관된 삶은 한국의 ‘기독교 지성 운동’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되었고, 그 영향력의 수혜자들 중 하나가 나 같은 무지한 청년이었다. 신앙을 지성의 영역에서 이해하고 자기의 신앙이 매우 합리적인 토대 위에서 소통될 수 있는 것임을 배우게 해준 곳이 IVF였고, 그 배후에 웨슬리 선생님과 같은 분의 영향력이 지대했다.
우리 아이들은 웨슬리 선생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할아버지 한 분이 청년 시절부터 평생 꾸준하게 걸어온 길은 결국 IVF 기독교 학생운동이 지금까지 이어온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결실을 맺었다. 그 수혜자인 나는 그의 삶을 그래서 함께 축하하고 기념한다. 그분의 친구가 되어 살아왔고 그분의 삶을 통해 배운 것은 진정한 특권이고 감사의 제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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