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웨슬리 선교사님의 대한민국 국적 취득을 기념하는 원고 청탁을 받고 선교사님과의 일을 추억하다가 거꾸로 만일 그분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기독교 학교’(Christian School)가 무엇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1996년 기독교 학교를 연구하겠다고 미국과 캐나다의 몇몇 기독교 학교를 방문하지도 않았을 테고, 미국 워싱톤 주 벨뷰(Bellevue) 시에 가서 알버트 그린(Albert Greene) 박사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테고, 벨뷰 기독교 학교(Bellevue Christian School)에서 연구년을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1997년 여름,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시애틀 공항에 내렸을 때 그린 박사님은 손수 마중 나오셨다. 당시 연세가 80대였던 박사님은 입국장에서 지팡이를 짚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몸이 불편하여 짐 옮기는 것은 도와줄 수 없다고 미안해하셨다. 나중에 그분이 장애인용 차를 직접 운전하여 벨뷰에서 시애틀 공항까지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일과 더불어 반년 남짓한 체류 기간 동안 그분이 우리 가족에게 베푸셨던 호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린 박사님의 <Reclaiming the Future of Christian Education>은 그해 여름방학에 교사 교육용 교재로 사용하신 원고였는데 1998년에 책으로 출판되었고, 번역본은 <알버트 그린 박사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가르치기>(CUP)라는 제목으로 2000년도에 출판되었다.
만약 웨슬리 선교사님을 몰랐다면 나는 교직 생활 내내 기독교 신앙과 학문 간의 인지적 부조화를 그럭저럭 견디면서 은퇴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 서가의 적잖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 서적 중 대부분은 선교사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선교사님을 교직 초기에 만나게 된 덕분에 나는 그동안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에 있어서 말씀의 증인된 삶이 무엇일까 고민하고 때로는 그 응답을 얻으며 기쁘고 감사하게 교수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잊을 만하면 메일로 보내주시는 웹사이트를 열어볼 때마다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두근거린다. 오늘 아침에도 그러한 메일을 받았다.
만약 선교사님이 없었다면 나는 ‘기독교학교자료센터’라는 공간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웨슬리 선교사님은 매우 열정적으로 ‘기독교 학교’가 어떤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애쓰시는 만큼 기독교 학교 네트워킹 사역이 진척되지 않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2002년도에 학교 앞 혜화동에 ‘기독교학교자료센터’를 시작하였다. 이 명칭도 선교사님이 지어주셨다. 문서로 밝힌 센터의 설립 취지는 거창했지만 직접적인 동기는 선교사님의 “나 늙어가고 있어!”(I’m getting old)라는 협박성(?) 발언 때문이었다. 그 당시 40대 초반이었던 내가 보기에 선교사님은 매우 연로하여 곧 돌아가실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시키신 것도 아닌데 나름대로의 ‘거룩한 부담’으로 센터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그때의 선교사님과 엇비슷한 나이가 되어 보니 그 판단이 큰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거나 나는 센터에서 ‘기독교 학교’의 비전을 가진 다양한 분들과 교제할 수 있었다. ‘기독교 학교’의 운영자와 교사, 기독교 홈스쿨 관련자, 일반 초중고등학교의 교사, 대학교수, 목회자, 대학원생 등. 그분들과 함께 ‘혜화동 포럼’도 갖고 교육 자료 개발 작업을 하면서 나는 기독교 학교의 실제(practice)를 조금씩 파악하게 되었던 것 같다. 선교사님의 칠순 잔치 때 자칭 ‘미녀 삼총사’로 뭉쳤던 오춘희 교수님과 백인숙 선생님과는 지금도 선교사님의 생신도 가끔 챙겨드리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으니 이 또한 감사한 일이다.
선교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사도 바울과 같은 ‘롤 모델’(role model)을 가까이 알고 지냈다는 것이 너무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선교사님은 노년에 자주 병원 신세를 지셨다. 그래서 입원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제 영영 못 뵙는 것이 아닐까 우려되었다. 병문안 갈 때는 이번이 마지막 만남이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감사하게도 그분은 매번 오뚜기같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셨고, 그때마다 나는 신실한 종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분을 묘사하기에 가장 적합한 성경 말씀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은즉 이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관이 예비되어 있나니....”(KJV, 딤후 4:7-8)가 아닐까 한다. 단지 한국 땅에서 평생을 문서 선교사 사역에 바쳤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선교사님은 내가 처음 뵈었던 1995년부터 변함없이 ‘신실하고 충성된 종’(good and faithful servant)된 모습을 보여주셨다. 언젠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분께 베푸실 상을 상상해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는 구원의 확신과 천국 소망은 있으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게으르게 살아왔으니 지금 천국에 간다고 해도 받을 상은 얼마나 초라할까. 아니, 상은 고사하고 부끄러워 주님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할 것 깉다. 지금부터라도 좀 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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