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원이삼 선교사님(87세)은 1965년 한국에 처음 입국한 이래 현재까지 줄곧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의 증인이자 산파 역할을 해 오셨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지난 2월 24일 과천정부청사에서 57년 동안 한국 교육과 인재 양성에 기여해 오신 선교사님에게 그 공로를 인정하여 특별공로자의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수여하였다. 그동안 수많은 사랑과 섬김의 씨앗을 이 땅에 뿌리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신 원이삼 선교사님을 통해 한국 기독교 지성 운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해 본다.]
- 장소와 시간 : 온라인(Zoom), 2022년 3월 22일(화), 오후 9시
- 인터뷰어 : 장수영(포항공대 산업공학과 교수, 동역회 이사), 양성만(우석대 교양대학 교수, 동역회 이사), 김샛별(오하이오주립대 교육학 박사과정, 동역회 정회원)
- 정리 : 석종준(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장수영 : 우선 지난 2월 24일 대한민국 국적 증서를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직접 받으시고 한국인이 되신 소감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웨슬리 : 기쁩니다. 제가 한국에서 보냈던 지난 모든 시간들에 감사하고, 대한민국 시민이 되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양성만 : 선교사님께서 1965년 한국에 처음 오시기 전까지의 가정 배경, 성장 과정, 대학 생활 등,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간략히 소개 부탁드립니다.
웨슬리 : 저는 뉴잉글랜드라는 지역에서 자랐어요. 당시 그곳은 청교도 윤리가 지배적이어서 주일에 영업하는 데가 약국 밖에는 없을 정도였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녔지만,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 정도로 이해됐죠. 아버지의 재혼 후, 새어머니가 저를 교회로 데리고 갔는데, 돌아보면 그 시기가 제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양성만 : 대학생이 된 이후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안다. 그 이후 선교사님의 삶의 방향을 결정해 준 것이 무엇인가요? 어떤 굴곡이 있었나요?
웨슬리 : 어쨌든 저는 1953년 버지니아 공대 재학시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했어요. 예수님께서 저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분을 믿어야 산다는 사실을 진짜 깨닫게 되었지요. 그러나 여전히 당시의 기독교 문화는 윤리적인 측면이 강했기에, 복음을 이성과 지성의 측면에서도 안내해 줄 그리스도인 학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처음으로 기독교 학문 또는 기독교적 지성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믿게 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으니까요.
양성만 : 어떻게 해서 한국으로 오시게 되었나요? 한국 입국 이후 추구하신 일의 방향이 어떻게 발전, 변화되었나요?
웨슬리 : 대학생 때 IVF(Inter Varsity Fellowship) 소속이었는데, 거기서 만난 사람들, 성경을 가르쳐 준 선배, 멘토 등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된 셈이에요. 그때 IVF의 선교 그룹에서 한국의 선교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한국이 1950년대, 세계에서 교회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나라임을 알았습니다. 학부 졸업 후에는 같은 대학 ‘위생공학’(sanitary engineering)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과정 중에 휴학하고, 하사관으로 군 복무를 했어요. 군 제대 후에는 1년 동안 성경학교를 다녔어요. 석사학위를 받고 나서는 캔자스시에 있는 Black & Veatch라는 ‘위생공학’ 업체를 다니면서, 해외 파견직에 관심이 있음을 밝혔는데, 어느 날 누가 한국에 자리가 났는데 갈 생각이 있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하지요”라고 답했어요.
양성만 : 선교사님의 직업은 엔지니어이십니다. 한국에서 어떤 일들을 하셨는지 간단히 소개해 주시지요. 한국 입국 첫해(1965년)부터 줄곧 광주기독병원의 신축과 증축 현장 감독으로, 또 1973년부터 약 3년 동안 전주 예수병원 안전담당자, 신축공사 감독 등으로도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웨슬리 : 제가 한국에 와서 어쨌든 초창기 엔지니어로서 줄곧 참여했던 중요한 일은 청계천 하수처리장과 관련된 일이었어요. 그때 지금은 가장 오래된 오텔 중 하나인 반도 호텔에서 머물고 그랬죠. 그 일이 끝났을 때 함께 한국에 나와서 일했던 선배 엔지니어들은 돌아갔지만, 저는 한국에서 계속 사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광주에는 기독병원에 의사로 의료선교를 와 있던 대학 친구들이 있어서 방문했고, 그 계기로 입국 첫해(1965년)부터 광주기독병원의 병동 신축 현장 감독으로 약 1년 일했고, 증축공사 감독(976-1977)으로도 있었지요. 또 1973년 11월부터는 약 3년 동안 전주 예수병원의 관리와 안전담당자로 일했습니다.
웨슬리 선교사 한국선교 50주년 기념 '헌정도서' 출판기념회 (2015년 9월)
장수영 : 선교사님은 1980년 초 한국 창조과학회, 그 이후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 또 기독교학문연구회 설립에 중요한 도움을 주셨는데요. 한국의 기독교 학자, 학문계에 어떤 필요가 있다고 보셨는지, 어떤 도움을 주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웨슬리 : 글쎄요. 한국 창조과학회는 제가 초기에 그 구성원들을 크게 돕거나 동기부여 해줬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창조과학회 회원들한테 책을 제공하고, 기독교 신앙과 과학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면서 나름 도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이미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1980년 CCC 정동 채플 집회에 미국 창조연구소(ICR)의 소장 헨리 모리스(Henry M. Morris)와 탁스톤(Thaxton), 월터 브래들리(Walter Bradley), 듀안 기쉬(Duane T. Gish) 등이 와서 기독교 신앙과 과학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갔지요. 저는 헨리 모리스와 의견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존경스런 학자이자 교수였어요. 당시 한국의 그리스도인 과학자들, 즉 연세대의 김정한 교수, 카이스트의 김영길 교수 등 많은 사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장수영 : 1986년부터 KOSTA 조직에도 참여하시고 또 구성원들을 도운 것으로 압니다. 그 내용과 결과를 소개해 주세요.
웨슬리 : 저는 미국에 갈 때마다 어지간하면 학생들과 연결되려고 노력했어요.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이미 절반 정도는 한국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한국에 있는 교회들과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그렇지요.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당시 저는 어떤 이유로 미국에 돌아가 부모님과 몇 년이라도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느껴서 미국으로 돌아갔었지요. 그때는 제가 플로리다에서 오래 머물렀던 시기인데, 플로리다 대학교 (University of Florida)에서 열정적인 그리스도인 학생 집단을 만나면서, 다니던 회사까지 그만두고, 미국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기독교 관련 책을 전달해 주곤 했지요. 유학생들을 주로 만나려 했고, 그중에는 한국인들도 있었는데, 그 와중에 코스타에 함께 참여해서 돕기도 했었습니다.
김샛별 : <사랑해요, 웨슬리 선교사님>(예영, 2004), <문서선교사 웨슬리 웬트워스>(IVP, 2015)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선교사님은 많은 한국의 젊은 학자들 사이의 친교 네트워크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웨슬리 : 이유라고 하면, 일단 변증적 사고에 관심을 가졌고, 저 자신이 기독 지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시작점이겠죠. 저는 복음주의 그리스도인인데요. 제가 자유주의 기독교 신앙을 택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청년과 젊은 학자들에게 ‘그리스도와 학문’(Christ and Scholarship)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일을 하게 되었지요. 어렵지만 계속 투쟁해 나가야 할 일인 것 같아요. 또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 지성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청지기로서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방법이라는 생각했지요.
장수영 : 선교사님을 가까이 사귄 한국인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선교사님에 대한 가장 인상적이 이야기는 선교사님의 초인적으로 검소한 삶에 관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도전받고 있지요. 왜 그러한 삶을 살게 되셨나요?
웨슬리 :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저의 뉴잉글랜드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우 가난했고 어려서부터 쓸 돈은 항상 스스로 벌어서 썼습니다. 그리고 제가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더 그렇게 되는 면이 있네요.
장수영 : 한국에서 지난 57년을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 가장 슬펐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웨슬리 : 글쎄요, 제가 과거지향적 사람이 아니라서 특별히 슬펐던 일로 기억되는 건 없는 것 같아요. 한 가지 정말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있었습니다. 한센인들의 한숨과 눈물이 있는 여수 애양원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그때 어느 의사 선생님이 한 분 계셨는데, 환자의 몸을 거리낌 없이 부여잡고 치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감동적이었던 것 같아요. 제 의사 친구가 전해준 말인데요. 그 의사 선생님에게 환자를 치료할 때는 고무장갑을 끼라고 권했더니 여기는 기독교병원이라며 그 권유를 거절을 했다더군요.
김샛별 :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어떻게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웨슬리 :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과거와 현재라.....저는 늘 ‘앞’만 바라보고 달리기 때문에, 그다지 ‘과거’에 대한 생각을 하진 않습니다(하하). 그래도 하나만 말씀을 드리면 ‘멘토링’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바로 생각나는 예는 손봉호 교수와 강영안 교수의 관계입니다. 제가 강영안 교수를 손봉호 교수에게 거의 무작정 연결해 준 면이 있는데요.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아름답습니다.
웨슬리 선교사 고신대 명예교육학박사 수여식(2004년 2월 19일)
김샛별 :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웨슬리 : 더 나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우선 ‘연결’과 ‘협동’일 겁니다. 김샛별 학생에게도 이전에 부탁했듯이, 교육과 심리학을 공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 학자들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모여야 해요. 일단 만나서 서로 알아가고 격려하면서 우리 한국에서 어떻게 함께 배움을 장려할 수 있을지 서로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교육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식 교육’(Christian schooling)을 이야기할 때, 항상 협력(Cooperation)을 강조합니다. 현재 우리는 너무 개인주의에 치우쳐있어요.
김샛별 : 최근 건강에 어려움을 겪으셨지요. 현재 건강 상태는 어떠신지요?
웨슬리 : 현재 저의 가장 큰 걱정은 무엇보다 기억력 문제에요. 치매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뭔가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자꾸 늘어 이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느낍니다. 다행히 도와주는 친구가 있어 병원에는 필요할 때마다 쉽게 드나드는 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제는 그 이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마무리를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인데, 실버타운에 갈 수도 있겠지요. 이런 생각을 하며 준비하는 과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없진 않습니다.
김샛별 : 선교사님은 요즘도 캠퍼스에서 청년들을 직접 만나서 교제하시는 것으로 압니다. 한국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웨슬리 : 후세대 교육에 관심을 가지라고 강조하고 싶어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 가서 뭘 배웠는지,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는지, 오늘의 우리 삶에서 하나님 나라와 어떻게 접목할 수 있는지를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은 저절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러한 시각과 세계관을 아이 때부터 키워주는 게 필요합니다. 저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학자 친구 중 한 명은 임금이 더 낮은 직업으로 바꾸고 이사했는데 그 이유가 오직 아이에게 좋은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하고 싶어서였지요. 이러한 것이 바로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헌신적 교육입니다.
장수영 : 선교사님은 한국 역사와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분으로 기억되시길 바라실까요?
웨슬리 : 그저 한 명의 ‘(주님의 ) 종’, 내지는 ‘봉사자’(servant)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