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한때 ‘기독교 미술은 곧 성화(聖畫)’라는 등식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기독교 미술을 인식해왔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풍경화나 인물화 등이 ‘세속적’이라면, ‘성화’는 성별(聖別)된 것으로, 마땅히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일부 작가들 사이에 뿌리내렸다. 성경의 장면을 모티브로 삼거나 종교적인 이미지에 기울어졌던 것은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런 경향은 그리스도인 작가들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청지기 역할을 간과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도인 작가들이 기독교를 ‘삶의 체계’로 인식하고 세상 속에서 청지기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몇 사람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기독교미술’이란 개념조차 희미했을 때 이연호(1919-1999)는 한국 기독교미술의 태동과 형성에 산파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를 창립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미술을 정착시키고 계몽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서봉남은 <기독교미술>(1978)이라는 저서를 통해 성경 속 미술의 역사를 비롯하여 초기 기독교의 카타콤에서 현대 기독교미술까지 개괄하는 등 기독교미술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리스도인 작가들의 다체 아트미션이 주최한 크리스천 아트포럼을 마치고(2019)
198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면서 일군의 청년 작가들은 기성 작가들과 궤(軌)를 달리하면서 새로운 각오로 창작에 임하였다. ‘기독미술단체연합’(CAGO)은 미술문화캠프를 개최하여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였고 이를 토대로 전시회를 가졌다.
그 후 중견 작가들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가세함으로써 힘을 보탰다. 1995년 한국미술인선교회의 심포지엄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만물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성경적 대안임을 믿고 고백한다. 우리의 미술도 창조, 타락, 구속의 틀 안에서 조명됨으로써 그 실체가 밝혀질 수 있음을 선언한다.”라고 밝혔다. 이 선언은 미술을 신앙고백의 차원을 넘어 성경적 구조 법칙 아래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과거와 구분된다. 선언문을 작성한 오의석(대구가톨릭대학 교수)은 이후 이를 자신의 작품과 <로고스와 이미지>, <체현의 미학> 등의 연구로 구체화했다.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이자 화가인 박영은 개혁주의 예술론을 소개하였다. “기독교 미술과 역사적 과제”(1994)에서 기독교 예술의 이상적 세계를 추구하는 관점과 기독교로 문화를 변혁하는 관점으로 나누고, 각각의 장점을 설명한 다음 그리스도인 작가들이 성경적 견지에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시대적 책무를 다할 것을 주문하였다. 사학자 이석우(1941-2017)는 <역사의 들길에서 만난 화가들>, <예술혼을 사르다간 사람들> 등의 저작을 통해 국내외 화가들의 작품세계를 분석하였다. 작가를 관찰할 때 그가 유의한 것은 작품에 내재된 실증적 사실보다는 철학적, 종교적 함의였다.
2천년대는 신학자, 목회자들이 합류하면서 이론적 기틀을 견고히 하고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확산시키는 국면에 돌입했다. 최태연(백석대 교수)은 기독교 예술을 동시대적 국면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특히 그는 포스트모던 상황에서의 그리스도인 예술인의 현실적 대응에 주목하였다. 그는 기독교 세계관이 포스트모더니즘과의 근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은 공통점을 지녔다고 보고 “다른 세계관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고 경쟁”하면서 세상 속에서의 복음 선포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는 기회의 활용을 제안하였다.
신국원(총신대 명예교수)은 예술 분양에서 개혁주의 정신을 오늘의 역사적 현실과 미래의 도전에 부합한 형태로 재창조해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창조 세계가 타락으로 인해 탄식하고 있을 때 예술가가 “구속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일원으로서 죄악 세상의 구속을 통해 샬롬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 형성에 이바지”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그는 문화예술을 통해 추구해야 할 비전은 샬롬이며, ‘정의와 화평의 실현인 샬롬의 추구’를 기독교 예술의 주요 의제로 설정한 바 있다.
라영환(총신대 교수)은 <모네, 일상을 기적으로>, <반 고흐, 삶을 그리다> 등 활발한 저술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이 어떻게 예술 속에 구현되었는지 점검한다. 특히 그리스도인 학자로서 반 고흐의 삶과 작품 속에 흐르는 신앙적 철저함과 예술적 독창성을 밝힌 것은 성과로 평가된다. 안용준(백석대 교수)은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와 한스 로크마커(Hans Rookmaaker)의 예술론을 연구해오고 있다. 이외에도 시각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의 관점에서 활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데, 유튜브의 ‘로고스 커뮤니티’를 운영하는 배경락 목사와 ‘교회교육연구소’의 박양규 목사가 그러하다. 예술작품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관을 생활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습득하는 채널을 구축했다. 안재경 목사는 네덜란드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개신교 화가인 렘브란트와 고흐를 다룬 <렘브란트의 하나님>과 <고흐의 하나님>을 출간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때만 기독교가 진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C. S 루이스의 말처럼 지성인들의 예술 참여는 그 자체로 유의미할 뿐 아니라 문화 전반이 세속화된 환경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한 의미 있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이 운동이 예술계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미미할지 모르나 중심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예술계에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개혁주의 미술사학자 존 월포드(John Walford)가 말했듯이 우리에게 “세상에 대한 일관되고 통일된 비전”으로 예술을 바라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일은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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