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정치적 착각에서 벗어나라!
<정치적 착각> | 자끄 엘륄 | 하태환 역 | 도서출판 대장간 | 2011
자끄 엘륄(Jacques Ellul)은 오늘날 사람들이 정치적 착각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정치적 착각이란 정치와 정치가들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착각이며, 나아가 모든 것을 정치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보았다. 정치화란 모든 사회적 문제를 정치적 방식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삶의 모든 문제는 정치적인 것에 종속되어 있다. 예술도 가치도 정치화되고 있다. 실제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되는 것은 이젠 더 이상 가치들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정치적인 것이 탁월한 가치가 되었고,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 가치들이 정돈된다. 오늘날 인간의 모든 것은 정치에 따라 평가되고, 그것은 최종적인 가치가 되었다.
정치 권력들은 결정을 하지만, 그 결정은 정치인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없도록 제한되어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람들은 가치들에 무관심하고, 가치들을 ‘사실’의 차원으로 데리고 왔다. ‘사실’에 직면해 있는 정치인의 선택에서 가치보다는 효율성이 정치 행위의 기준이 된다. 모든 정부는 생활 수준의 향상을 위해 존재하고, 아직도 존재하는 힘의 정치는 단순히 이 목적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가혹한 경쟁 체제와 기술화한 세계 속에서는 효율성이 정부의 유일한 합법성의 기준이 된다.
정치적 결정의 다른 극은 일시성이다. 우리의 문명 전체는 일시적이다. 오늘날 정치가 매달린 일시성의 가장 중요한 현상은 뉴스이다. 현재의 정보 상황은 끝없는 자극을 만들어내고, 계속된 반응을 유발하며, 편견을 되살리고, 집단을 경화시킨다. 더 나아가, 뉴스에 몰입함으로써 다양한 정치 수준에 대한 무지가 생겨나므로 다양한 정치 수준을 파악할 수 없게 된다. 뉴스에 사로잡힌 인간은 더 이상 자유가 없고, 예견 능력이 없으며, 더 이상 진실을 보지 못한다. 과거에 대한 포착과 지속성이 없으면 정치도 없다. 뉴스는 지속성의 의미를 추방하고, 기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다.
효율성은 정치의 일반적 법칙이지, 도덕적 법칙이 아니며, 모두에 의해 인정된 법칙이다. 오늘날 정치는 우리의 민주적 도덕성, 자유주의적 또는 평등주의적 휴머니즘, 사회주의적 가치에 상관없이 자율적이다. 모든 전쟁은 부당하고 모든 폭력은 단죄받을 만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는 개인이나 도덕론자의 일이고, 국가는 전혀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영적인 생활을 하고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리고 이 사람이 이 가치가 어떤 윤리적 소명을 완수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 사람과 정치 사이에는 거리가 있음이 명백하다.
정치 세계는 실제적인 세계도 아니고, 거짓의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심리적 세계로서, 현실에 비해서는 허구적이다. 오늘날의 선전은 모든 정치적 문제의 창조자이다. 현대인이 세상 위에 덧씌워서 세상을 보는 이미지가 고정관념이다. 현대인은 이 고정관념을 통해서 사물을 보고 환경을 이해한다. 따라서 정치 행위는 필연적으로 여론이 쓰고 있는 안경, 즉 사물과 환경을 굴절시키는 안경에 따라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의 착각은 정치적 길을 통해 시민이 국가를 지배하거나 통제할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시민은 강력하게 조직되고 선전에 의해 조종된 대중 속에 통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정치 문제를 사실과 관련된 ‘지식’의 문제가 아닌 심리적인 감정과 관련된 것으로 착각한 결과, 정치 문제는 ‘지식’의 문제가 아닌 ‘판단’의 문제가 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표면상 시민의 참여가 확대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무능한 시민이 만들어진다. 모든 문제가 정치적인 것이고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있으며 정치가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공한다는 생각은 착각이고 속임수이다.
엘륄은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하며 그릇된 문제와 방법과 해결에 매달리게 하는 정치에서 벗어나는 ‘탈정치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탈정치화’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그릇된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탈정치화’는 근본적으로 국가에 대립할 수 있으며 국가의 압력이나 통제나 지원을 거부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관, 단체, 집단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긴장을 발전시키고 다각화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착각을 없애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긴장은 안정된 상황이 아니어야 하며,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는 동시에 다른 차원에서 다른 형태로 재생산되어야 한다. 사회가 존속하고 진보하기 위해서는 갈등의 중심지가 있어야 하며, 문화적이거나 경제적인 영역 등 모든 영역에서 긴장의 축이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경향과 반대되고, 우리의 나태와 맹목과 안락과 평안에 반대되며, 기술과 조직의 자동성에 반대되고, 사회적 조직화와 경제적 복잡성에 반대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다시 생각해야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하며 다시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이 다. 우리가 자신의 안전과 삶의 안정과 복지 증대에만 신경을 쓰면서 ‘효율성’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민주주의를 살리는 데 필요한 힘을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엘륄은 핑크빛 미래를 그리지 않는다. 그 대신, 우리에게 각자의 운명을 책임지라고 말한다. 이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물질적 안락함을 포기하는 것처럼, 정치적 착각에 근거한 조악한 우리의 믿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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