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교육에는 왕도가 없다. 뛰어난 교육학자, 존경받는 성자라도 자녀 교육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자녀의 성격, 가정과 사회 환경, 자신의 인격적 특성 등 워낙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교육으로 성공한 것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지만, 한국 청소년 교육은 문제투성이고, 한국 교회는 선교 역사상 가장 빨리 성장했는데도 아동 청소년 신앙교육에는 실패하고 있다. 어떤 교육전문가도,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도 뚜렷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한국이 교육을 포기할 수 없고 한국 교회도 신앙교육을 단념할 수 없다. 아무리 어려워도 방법을 찾고 수행해야 한다.
교육에는 세계 어떤 공동체도 유대인을 능가하지 못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박해와 극심한 모멸을 그렇게 오래 당했으면서도 민족의 정체성을 꿋꿋이 지키고 예술, 학문, 경제,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른 어느 민족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성취하고 있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다. 비록 많이 세속화되고 분열되었지만, 유대교를 꾸준히 잘 지키고 있다. 물론 역사와 상황이 그들과 전혀 다른 우리가 그들의 교육 방법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성취에서 중요한 시사점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유대인들도 지식교육을 무시하지 않지만, 결코 우선적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지식 그 자체보다는 지식을 늘리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자질과 동기를 형성하는데 더 큰 관심을 둔다. 즉, 인성교육에 치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성교육과 신앙교육은 말과 글을 통한 지식전달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교육자의 모범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에도 “본받으라”라는 명령이 자주 등장한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고 하셨고,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명령했다. 성경의 신앙교육 방법은 모범을 보여 따르게 하는 것이다.
어린 자녀를 둔 유대인 부모들은 가능하면 유대인 가운데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도덕적으로 존경받는 유명 인사를 자신들의 집 식사에 초청하려 애쓴다. 자녀들을 그 명사에게 가장 가까이 앉히고 자신들은 말을 삼가므로 손님이 가능한 한 말을 많이 하도록 해서 아이들이 경청할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자신들이 자녀들에게 ‘모범’(role model)이 되지 못하더라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다른 우수한 모범을 아이들 눈앞에 직접 소개하는 것이다. 자녀들의 미래와 교육을 위하여 자신들 대신 다른 ‘롤모델’(role model)을 제시하므로 자신들의 위신이나 자존심을 희생하는 그들의 지혜와 자녀 사랑은 감격스럽다. 자녀들은 초청된 명사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고 많은 것을 배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들 부모의 그런 사랑과 양보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울 것이다. 그런 부모들을 존경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가르침도 무시하기 힘들 것이다.
탈무드에 충실한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날 밤에 어머니는 촛불을 켜고 아버지는 자녀들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축복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아이들은 그들에게 미리 주어진 동전을 '유대민족 기금' 상자에 넣는다고 한다. 매주 금요일마다 가난한 사람들이 구걸하러 오면 그 상자에 모여 있는 돈을 반드시 아이들 손으로 기부하도록 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연습을 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쉽게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청소년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조사했던 한 교육학자에 의하면 그 청소년들의 부모들에게 두 가지 공통점이 드러났다고 했다. 자녀에 대한 무관심과 ‘일관성 없는 훈육’(erratic discipline)이었다. 그것은 신앙교육의 실패에도 마찬가질 것이다. 자신들의 권위나 자존심보다 자녀들을 더 사랑하고 자녀들의 존경을 받을 때 비로소 말로 하는 훈육도 먹혀들 수 있다. 그러나 사랑과 관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라도 자신들이 정직하거나 공정하지 못하고 훈육에 일관성이 없으면 자녀가 믿을 수 없고, 믿지 못하면 신앙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교육도 효과가 날 수 없다. 자녀를 직접 속이거나 억울하게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고 불공정하게 행동하는 것을 자녀들이 보면 부모에 대한 존경과 신임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모가 시킨 대로 행동했는데도 책망하거나 벌을 주고, 금지한 것을 했는데도 벌을 주지 않으면 자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된다. 부모의 참 의도를 몰라 당황하다가 마침내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야 부모든, 교역자든, 주일학교 교사든, 교육자들이 청소년들에게 철저히 정직하고 신실하되 일관성 있게 말하고 행동해야 신앙교육도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
최근에 시행된 한 여론 조사에 의하면, 기독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신뢰도는 100점 만점에 18.1점, 호감도는 25.3점으로 천주교 65.4점, 불교 66.3점보다 두드러지게 낮고 과거보다도 더 낮아졌다 한다. 비록 전적으로 공정하고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사회로부터 그런 수준의 불신을 받는다면 한국 개신교인들의 도덕성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음이 확실하다. 이런 수준의 신뢰도로 과연 아동 청소년들에게 신앙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아동 청소년 신앙교육이 성공하려면 성인 교인들의 신앙이 먼저 건강하고 성숙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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