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교직 생활이 30년이 훌쩍 넘다 보니 장성한 제자들로부터 자주 연락을 받는다. 그 중 가끔씩 나에게 전화를 해서 “선생님, 교회 좀 어떻게 해 보세요. 제가 선생님 생각해서 참고 있지만 너무 화가 나요.”라고 하소연을 하는 제자가 있다. 학창 시절 나를 통해 복음을 들었고, 아직 교회에 나가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나가고 싶어하는 친구다. 그런데 가끔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담임목사직 세습, 목회자 성범죄, 과도하게 특정 정파에 경도된 성도들, 전혀 사랑을 느낄 수 없는 혐오를 남발하는 성도들 등을 볼 때, 교회 나가고 싶은 마음과 저들이 있는 교회에는 나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혼재돼 심히 괴롭다며 호소를 한다.
이 친구뿐 아니다. 직장의 동료들이나 초·중·고·대 동창들 중 나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들의 비판은 훨씬 더 노골적이다. “지지난해 아파트 값이 폭등할 때 자신이 거주하는 아파트를 과도하게 높여 그 이하로 팔지 말자는 담합을 할 때 그것을 주도한 분이 맨날 교회 나오라며 자기 교회 주보를 나눠주던 권사님이셨어. 그리고 우리 아파트에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아도 ‘이렇게 하면 안 되는 것 아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어. 물론 나도 속물이지만 그리스도인들도 다를 바 없더구먼.” “내가 전세 사는 집주인이 그리스도인이야. 그런데 전세값이 1억, 2억 급등할 때 나는 우리 집 주인이 그래도 주변 시세보다 덜 올릴 줄 알았어. 웬걸? 악착같이 시세보다 더 올리더군. 씁쓸했어.” “교회는 입만 열면 사랑을 가르치면서 왜 큰 교회 목회자와 작은 교회 목회자들의 월급이나 생활 수준은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 그들의 사례는 끝이 없고 너무나 구체적이어서 반박할 수가 없다.
이들의 비판의 핵심은 한 가지다. 그리스도인들과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뭐냐는 것이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훨씬 더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라는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때 청와대에서 고위 공직자들 가운데 다주택자들은 한 채만 남기고 나머지는 팔라고 명령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어느 교회 강단에서 집 두 채 가진 자는 한 채를 팔아서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는 설교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정부에서는 임대료를 동결하는 건물주에게 세금 혜택을 주겠다며 이를 유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느 교회에서 임대료와 전세값을 동결함으로 ‘코로나19’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라고 설교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교인들이 점차 큰 교회로 몰리면서 작은 교회 목회자들이 생활고에 몰리는 상황에서, 교회는 기껏 이중직 허용 문제를 논할 뿐 노회 차원에서 목회자 월급을 모아 노회 소속 목사들에게 균등하게 지급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 역시 들은 적이 없다.
이제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하다. 그것은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눅 3:11)라는 세례요한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라는 예수님의 애정 어린 말씀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우리가 사회주의를 하자는 것이냐?”라고 색깔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복음에서 떠나 있다는 이야기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말씀, 내게 유리한 말씀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씀, 내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말씀, 자본주의적 물신주의를 뛰어넘어야 하는 말씀은 듣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게 닫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세상은 더 이상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며 복음을 듣지 않으려 한다. 복음은 눈에 보이는 물질의 문제를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라고 응수를 하고 있다. 즉, “너희가 주장하는 영생이 있고 너희가 정말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 세상의 유한한 물질주의를 뛰어넘는 삶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도 정말 영생이 있으면 좋겠고 그에 속하고 싶다. 하지만 먼저 영생을 소유하였다는 너희의 삶을 통해서는 영생을 느낄 수가 없으니 제발 보여 달라.”라고 부르짖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서 부동산 광풍과 극단적인 물질주의 가치관 가운데서도 이러한 흐름을 거슬러 살아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리스도인들을 본다. 자신을 위해 최소한으로 소유하고 검소와 절제와 나눔을 통한 이웃 사랑의 삶을 가르치고 함께 실천하는 교회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아직 한국 교회를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았고 이 적은 무리를 통해 일하심을 본다. 아마 한국 교회는 이들의 수가 늘어나는 만큼만 한국 사회 내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속임을 받지도 업신여김을 받지도 않으시고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갈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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