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십여 년 전 유튜브에서 “Run!”을 외치는 설교 영상이 유명했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두드렸다. 지금 보니 오히려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아 지난 십여 년간 기독교 운동을 했던 사람으로 마음 한편이 무겁다. 우리의 신앙적 질문은 무엇일까? “교회 다니세요? 어느 교회?” 오랜 친구는 늘 나에게 물었다. “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니?” 그리고 지긋하신 한 선교사님은 만나는 청년들에게 꼭 묻는다. “너의 일이 하나님 나라와 무슨 상관이 있니?” 우리의 삶과 하나님 나라. 지긋지긋하게 묻던 이 질문의 응답은 현재 기독교에 대한 평판의 답이다.
우리는 어떤 신앙적 질문을 품고 사는가?
우리 삶이 너무 암담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소망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예언자적 소명이라 보일 수밖에 없는 현실. 지금 우리는 그 속에 살고 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곳은 ‘사회적 경제’, ‘마을공동체’라 불리는 영역이다. 곳곳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그리스도인들을 종종 본다. 자신의 신앙을 말로만 하지 않고 이웃과의 화평하게 하는 곳에 서 있는 사람들, 지역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려 바동거리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지역에 보탬이 되고픈 교회와 단체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을 본다. 그들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리스도가 중심이었고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교회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교회적인 것’에 둘러싸여 산다. 그리스도인만의 언어가 있고 문화가 있다. 그러다 보니 그리스도인의 언어도 게토(ghetto)화 되었다. 대학원 수업에서 발제하는 중 권사님, 집사님, 자매님 같은 호칭을 쓴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말이다. 낸시 피어시( Nancy Pearcey)는 <완전한 진리>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로서 이중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했는데, 나는 책만 그렇게 읽었던 거다. 교회 밖의 세상에서 나를, 나의 삶을 더 반추할 수 있었다.
어쩌다 대구의 기독교 역사 길을 걷게 된 적이 있다. 100주년을 기념하고 있는 역사관을 둘러보는데 문득 인터뷰 대상으로 만났었던 마이클 고힌(Michael W. Goheen)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지금의 일이 100년 뒤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기억될까?” 우리의 안목이 좀 더 길고 포용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안녕하신가요?
시대는 참 빨리도 변한다. 최근 내가 연구했던 주제는 ‘1인 가구’였다. 3년 전까지만 해도 대두되지 않던 이 이슈는 지금은 보편적이다. 특히나 ‘코로나19’를 겪으며 1인 가구로서의 애로사항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저 1인 가구에 2030대만 떠올린다면 지금 한국 사회를 보는 안목을 더 넓혀야 한다.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만큼 시대의 변화는 빠르고 우리의 안목과 지각이 넓어지기까지는 오래 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복음이다.
제임스 올타이스(James Olthuis)가 말한 것처럼 변치 않는 복음을 시시각각 변하는 시대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할지 고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좀 더 현장으로, 삶으로 내려올 필요가 있다. 교회도 좋은 일을 한다. 아쉽게도 아직도 교회의 좋은 일을 결정하고 판단하는 것은 목회자 그룹이다. 우려되는 점은 좋은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좋은지 증명하고 검증하고 평가하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기독교 이미지가 생긴 데에는 불통과 불투명함이 한몫 했다고 본다.
안타까운 것은 주위 친구이자 목회자인 이들을 보면,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같은 목회자 그룹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의 삶의 현장을 직접 보거나 전해 들어야 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삶과 경험에서 어떤 고민과 이야기를 갖고 있는가? 우리의 소통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가? 복음을 전하고픈 이들은 누구이며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아직도 교회 안에서 성도들의 삶을 드라마로 경험하고 있다면, 집 밖으로 나와서 미디어를 벗어나 진하고 깊은 관계 속에 사람과 삶을 포용하기 바란다.
세계관은 무엇일까? 나는 십 년의 공부 속에서 내가 내린 정의는 포용이다. 상대의 생각이 다르고 삶이 다를지라도 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우리 안에 있을까. 물론 세상은 참으로 악하다. 그리고 소망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승님에게서 배운 많은 것 중 하나는 내가 서 있는 곳에 두 팔을 뻗어 내가 뻗은 그 팔 영역만이라도 하나님 나라가 이뤄지길 애쓰는 것이다. 그런 삶을 소망하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렇게 살아낸 사람들을 통해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은 더 살만한 세상이 된다, “이렇게 살수도 있구나”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이 우리에게 있길 바란다. 100년 뒤, 그렇게 살아낸 우리의 작은 이야기와 삶들이 회자되기를 소망한다.
지금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리고 싶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신앙은 안녕한가? 여러분의 일, 여러분의 전 인격적인 삶, 여러분의 영과 혼과 육을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는가? 나와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기억되길 바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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