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기독교의 정체성?
‘기독교’라는 우산 아래 다양한 ‘기독교’가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이 ‘기독교’는 수많은 이의 구원의 방주가 되었지만, 동시에 서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하고, 심지어 전쟁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독일에 나치주의자들이 일어나 파시즘의 성격을 띤 제국기독교(Deutsche Reichschristen)를 형성하여 복음적인 고백교회를 탄압하였던 사례가 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과 청교도 후예들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고,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배후에 러시아 정교회가 확신에 찬 비호를 하고 있다. 이들 현상은 모두 ‘기독교’의 이름 아래, 심지어 ‘신의 이름’과 ‘신의 가호’를 외치고 있으니 과연 ‘진정한 기독교’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C.S. 루이스가 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추구하려 했는지 이해가 간다.
비열한 이기주의 집단?
언제부터인지 우리 사회의 기독교에 대한 평가는 다분히 냉소적이다. 사회가 교회를 염려한다는 말이 나돈다. 왜 그럴까. 최근에 <오징어 게임>(2021)이 극단적 사례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인기 요소 중 하나가 사회풍자, 사회고발이었다. 생활에 필요한 돈, 그런데 그 돈이 점차 사람을 지배하면서 물신(物神)이 된다. 사람들은 돈으로 인해 돈에 취하고, 끝내 돈에 포로가 되어 생명까지 담보로 한다는 내용이다. 극중 인물들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기에 어느새 극단적 이기심을 발동한다. 여기에 한 기독교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신앙인이라는 그 사람, 참 이기적이다. 목숨 건 게임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도를 하지만 주술 같이 들린다. 공포에 못 이긴 발버둥의 외침일 뿐이다. 극한 상황에 빠진 이유도 세속적 욕망 때문이었으니, 이는 신앙에 대한 배반이었다, 외줄타기 같은 경쟁 속에서 자신만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다. 결국 나락으로 떨어져 종말을 맞는다. 드라마는 그리스도인의 심리를 결코 고상하게 봐주지 않는다. 자기만 살아나면 그만이라는 비열한 이기주의자로 묘사한다. 믿는 자들이 자기만의 리그를 만들고, 그 안에 안주하려는 ‘당신들의 천국’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이 모습이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현실이 아닐까.
신앙 일상의 성실성!
반면 영화 <미나리>(2020)에서는 기독교적 정조(Mood)가 다르게 보인다. 정이삭 감독의 자서전적 생애를 다루는 가운데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이민 과정을 잔잔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의 이민, 다시 캘리포니아에서 아칸소라는 전원 지대로의 이동, 이렇게 어려운 고난을 헤쳐나가는 주인공 제이콥과 그 가족의 삶이 그려지는 가운데 기독교적 이미지가 적잖이 등장한다. 영화는 많은 복선과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로는 그 요소들이 부딪치고 화해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끝내는 가정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들고 있다. 미나리의 상징성은 어디에서 잘 자라는 인내, 끈기, 그리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불평만 늘어놓지 않는,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는 묵묵히 행동하는, 그 진지함과 성실함이다.
성공이라는 지상의 행복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그러나 가장으로 혼자만 고투하는 것은 아니다. 아내와 두 아이 모두 함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기에 한국에서 온 할머니는 전혀 다른 외톨이 같지만 결국 가족 모두를 끌어안는 ‘어머니(모성)’이다. 주변 인물로 보이는 이웃 폴, 마을 교회의 식구들은 꾸밈없이 서로에게 힘이 되는 신앙 공동체를 그린다. 주인공의 가정과 이웃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갈등, 화해, 신뢰를 형성하며 사랑으로 향하는 모습은 기독교적 플롯이라 하겠다. 비록 할머니(윤여정)가 “아이한테 그런 기도를 가르치지 말라”, “그런 천국은 안 가도 돼!”라는 대사를 했다고 반기독교적이라 평할 수 있을까!
기독교적 대안을 찾아서
현대 사회에 비치는 기독교는 부정과 긍정 사이를 오간다. 어떤 관점에 서느냐에 따라 기독교는 냉소적으로 비쳐지기도 하고, 때로 호모 데우스들(신이 된 인간들)은 ‘기독교의 종말’을 외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현재 기독교가 역사적 스캔들로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죄로 빠져든 것처럼, 현대 기독교, 그리스도인들도 어쩌면 복음의 정도(正道)에서 얼마만큼 벗어나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죄의 문제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와 형성된 바벨탑 같은 모임이지 예수님이 원하셨던 ‘바로 그 교회’는 아닐 수도 있다. 예수께서 책망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21:13). 그렇다면 이제라도 궤도 수정을 해야 한다. 성경으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대명제,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행되어야 할 절대 명제는 그리스도인 자신이 말씀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 그러할 때 비로소 사회를 위한 기독교적 대안(Christian Alternativ)은 발견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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