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11년 국회에서 십자가와 첨탑을 ‘인공조명에 의한 빛 공해 방지법’에 적용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논의했을 때, 기독교 관계자들이 반발하면서 시행령 적용대상에서 교회를 제외시킨 일이 있다. 2021년에는 교회의 빛 공해 문제가 공론화되자 서울시가 철거를 유도하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교계 지도자들의 저항에 부딪혀 이 역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번은 입법 추진, 또 한 번은 시(市)의 정책을 모두 막아냈으나 빛 공해의 피해자인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만큼은 피해가지 못한 것 같다.
이즈음 우리는 교회가 ‘네온 십자가’를 고집하는 까닭은 무엇인지, 십자가의 도상적 의미를 질문하게 된다. 십자가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인 카타콤 시대에는 발견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가장 보편적인 상징이지만 악명 높은 사형 수단이라는 점 때문에 초기 수 세기 동안 사용되지 않았다. 초기 상징물로는 ‘키로 모노그램’(Chi-Rho monogram)과 ‘희망의 닻’(anchor of Hope)이 있었는데 둘 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십자가 형태는 눈에 띄지 않는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십자가가 일반화되었으며 기독교 상징물들은 350년경부터 기독교 예술과 석관과 같은 장례식 기념물들에 주로 사용되었다. (사진 1 - 서성록-도시의 밤 풍경)
콘스탄티누스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 신자는 악의 권세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에 집중하였고 예수의 고통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는 피했다. 그러나 9세기 비잔틴 시대의 예술가들은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의 현실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의 눈은 감겨있고 머리는 숙여 있으며 몸은 처져 있다. 그 후 십자가에 대한 묘사는 회화든 조각이든 고통에 대한 다각도의 표현으로 발전해갔다. 로마네스크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머리에 ‘왕관’을 쓴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고딕 양식들은 그것을 ‘가시면류관’으로 대체하였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십자가 이미지의 비중이 현저히 낮아졌다. 개혁교회는 교회 건물과 성찬식 테이블 위에 성례용 십자가가 등장하기 시작한 20세기 전까지 십자가 사용을 장려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랜 기간 십자가 상징물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도 기독교의 정신을 이어왔다는 뜻이다. 그들은 십자가 상징물 대신 솜씨 좋은 전문가에게 의뢰해 성경 구절이나 십계명을 패널에 새겨 벽에 설치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런 패널들은 교회의 성례식과 연관되며 이를 통해 신자들에게 성경이 유일한 원천이자 준거란 칼뱅의 관점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의 유일한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교회가 빈약하게 만들어진 상징물에 의존하는 현상은 어느새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문제가 되는 ‘네온 십자가’는 교회가 도시와의 관계를 보여주는 본보기로 간주될 법하다. 어떤 목적으로 세워졌든 그것은 익명의 다수가 접한다는 점에서 ‘공공성’을 띤다. 그것이 십자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키치, 즉 ‘볼품없는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피해자들은 인공조명이 쏟아내는 과도한 빛으로 인해 밤잠을 설친다고 원성이 높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미관상으로도 그렇고 용도의 적합성 면에서도 기준에 못미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 밀집 지역으로 갈수록 심하게 나타난다. 도시교회의 사명과 역할이 문화적 방식으로 그 지역을 변화시키고 지역의 네트워킹을 통해 공동체를 형성해가는 데에 있다면 ‘네온 십자가’는 그 사역을 무색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는 셈이다.(사진 2 - 서성록-희망의 닻, 성 도미틸라 카타콤, 150-200년경)
솔로몬 성전의 건축은 하나님께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리기를 원하는 선한 마음의 사람들에게 맡겨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일에 가장 능숙한 예술가인 두로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했던 솔로몬은 종교적 신망보다는 예술가들의 탁월한 솜씨를 높이 샀던 것이다. 공교로운 예술성과 미적 가치는 구약에서도 성전을 건축할 때 중요한 고려사항이었다. 창조의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하나님과 그분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음을 놓쳐선 안 된다.
교회의 천부적 권리는 창의성과 인간 잠재성의 원천이 됨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창조와 구속에 참여하기 위한 부르심을 받았고 이것은 먼저 우리가 속한 모임의 장소, 즉 교회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영적인 능력을 기른다. 이로 인해 제임스 스미스(James K. Smith)는 “영혼을 위한 진실된 학교로 잘 꾸며진 환경”을 갖추라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진실된 학교’에 ‘볼품없는 시설물’이라니 논리에 맞지 않는다. “종종 나쁜 예술은 무지로 인해 영구화된다.”(W. David O. Taylor).
이전만 해도 ‘네온 십자가’는 어두운 밤길을 밝히며 힘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전의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주민이 잠을 설치며 피로감을 표시하는데 이를 회피하는 교회의 태도는 지역공동체의 관계 형성과 강화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가 공부방, 나눔 가게 운영, 사회봉사 등 여러 형태로 이웃 사랑을 실천해오고 있는데 이를 감쇄시키는 일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교회가 ‘표식’으로 교회 됨을 알리기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소통과 섬김을 강화한다면 지역공동체 역시 교회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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