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가벼운 마음으로 앞을 보며
나는 대학원생 시절부터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통해 배우고 경험하며 인연을 이어왔다. 기독교 세계관을 지켜나가기 위한 신앙 선배님들의 노력이 담겨온 공동체이고, 정기적인 학술대회와 학술진흥재단 등재지인 학술지도 발간하는 견실한 학술 단체이며, 이러한 신앙과 학문의 유산을 다음 세대 학자들에게 물려주고자 애쓰는 모임이었다. 근래에는 그리스도인 소장 학자 모임을 통해 각자의 영역에서 애쓰고 있는 젊은 학자와 연구자들과 교제할 기회를 얻게 되었고, 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많은 반성과 고민, 그리고 긍정적인 자극을 받고 있다. 특히 이 모임을 통해서 필자가 누린 가장 유익했던 것을 꼽는다면, 필자의 전공 분야를 넘어선 인문학, 과학, 공학, 예술을 포함한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 특히 신앙인이며 전문가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듣고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어떻게 나아가기를 바라는지에 대해 나누어주기를 바라는 원고 요청을 감히 받아들여 이렇게 글을 적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큰 주제를 필자가 말할 수 있을까? 단지 이 글에 대한 큰 책임감과 부담은 내려놓고, 가벼운 마음으로 앞을 보며 용감하게 적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의 생각은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생각이나 관점은 아닐 것이다.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라는 두 괴물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한 한 가지 이미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신앙에 대한 지성주의와 반지성주의라는 두 개의 극단 사이에 놓여있는 무언가라는 것이다. 필자가 정의하고자 하는 지성주의란, 이른바 이성적인 방법들을 통해 신앙의 영역을 설명하고 어떤 것들을 포함하거나 또는 배제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반지성주의란 신앙의 영역을 유지하기 위해서 지적인 방법과 성과들을 거부하거나 배제 및 방어하려는 관점을 의미한다.
지성주의의 한 가지 예는 과학주의가 될 수 있다. 과학자들의 현재 관점과 이론에 따라 설명하기 곤란한 것들, 또는 가장 최신의 학설과 배치되는 것들은 신앙의 영역에서 배제하거나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지성주의의 다른 예는 일부 기독교 근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다. 성경을 통해 믿고 이해해온 신앙의 모든 전통은 과학적으로 또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반드시 변증될 수 있고, 변증이 되어야만 하며, 그렇지 못한 방법론은 틀리다고 믿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서 많은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인 방법으로 ‘바로 지금’ 변증될 수 있어야 한다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반지성주의에 대해서 말하자면, 신앙과 이성의 영역에 충돌이 일어날 때, 이성적 주장들을 배제하거나, 정당화되지 않은 대안들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의미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영역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를 불신하는 태도가 전제되어 있거나, 아니면 전문가들의 입장과 비전문가들의 입장 사이의 중요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깊은 신앙이 이성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는 경우가 있다. 반지성주의에 있어서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치열한 탐구와 고민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대한 일종의 진영 논리, 그리고 이에 더해 개인적인 경험이나 체험이 더 큰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둘은 모두 괴물과 같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일정 부분 이 두 극단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이성과 신앙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노력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앙의 다음 세대가 새롭게 대응해 나가야 할 문제들이 끊임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도 우리가 직면한 또 하나의 사실로 보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간단하게 한 가지 시도할 수 있는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것은 성도들 모두가 어떤 의미에서 연구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연구자가 되기 위해 꼭 정식 학위 과정을 밟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신학적 질문에 대해서, 과학적 질문에 대해서, 세계관적 질문에 대해서, 정치적 또는 역사적 질문에 대해서, 어쩌면 지금까지는 ‘안전한’ 답을 정해놓고, 친절하게 설명해가면서, 결과적으로는 이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랐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러한 권위자들의 권위 있는 조언은, 다른 한편 신앙인들이 스스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지고, 정보를 수집하고, 자료를 평가하고, 때로는 토론하고, 답에 이르는 능력을 기르지 못하도록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신앙의 전통에 대해서 타협은 하지 않되, 신앙에 관한 질문,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방법론들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열어놓을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신앙 고백은 변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러나 이성적 연구를 위한 방법론은 잠정적이다. 지금 당장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 고백과 일치하는 답을 주지 않을 수 있지만, 이러한 고민과 토론의 무대에는 신앙인뿐만 아니라 비신앙인도 함께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우리에게 ‘유리한’ 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연구라는 것은 이러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성도들 스스로가 신앙의 본질에 대해 치열하게 답을 찾아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아직 청년들에게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에 대해 어떤 조건들이 더 필요할지, 어떤 신앙적 태도들이 전제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앞으로 이러한 질문과 고민을 더 이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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