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내게 기독교 세계관은 커다란 벽이었다. 알기 힘든 개념들과 수많은 철학적 용어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익숙함은 무서웠다. 나의 것이 아닌데 나의 것처럼,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익숙해지는 단어들을 내 것으로 여겼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을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칼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들어온 기독교 세계관은 30대에 이르기까지 내 주위의 모든 영역을 재단하는 도구였다. 문학, 영화, 음악, 저자, 문화의 세세한 부분까지. 나의 신앙이 이 정도라고 내밀 듯, 기독교 세계관은 무기이자 자랑이었다. 문화의 ‘영적 전쟁’에서는 충혈된 눈으로 뚫어져라 살펴 칼을 휘둘러 승리해야 했다. 그 대상에는 교회도 있었다. 교회의 작은 요소 하나까지, 그것이 내가 아는 기독교 세계관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재가며 비판했다. 교회는 정말 비판할 게 많았다. 매몰차게 비판의 말들을 쏟아내고 나면 시원했고 뿌듯했다. “그들은 모르고 나는 알고 있다”. 이것이 나의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한마디로 아주 ‘단순’(simple)했다.
기독교 세계관은 공식이었다. 나만의 공식을 만드는 데 있어서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그 많은 현학과 철학적 용어들은 공식의 미사여구가 되고 근거가 되었다. 어떤 미지수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공식으로 풀 수 있다고 생각으로 대면했던 현상들을 공식이라는 거대한 집합 안에 우겨넣었다. 전혀 복잡하지 않다. 간단하다.
이렇게 마음 편히(?) 살고 있던 내게 작은 돌맹이를 던져준 것은 다름 아닌 학교의 학생들이었다. 학생들과 깊이 있게 만나면 만날수록 그들 안에 있는 ‘사랑’이 보였다. 아니, 사랑의 ‘대상’이 보였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학생들의 각자 다른 사랑의 대상은 삶의 다양한 면으로 표출되었다. 교사로서 있으려면 그들의 사랑을 살펴야 했고, 그것을 토대로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했다. 그들의 마음속 근원의 사랑. 돌아보니 그것이 세계관이었다. ‘사랑’말이다!
학생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거울이 되어 나를 비췄다. 내가 가졌다고 믿었던 세계관이 사실 관념이었다는 걸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이전에도 내게 기독교 세계관은 있었겠으나 나는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나 실존적 고민을 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눈에 보이는 단면을 단순히 중립적이라고 믿은 구조에 맞췄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랑이 중립적인 것이 아니기에, 기독교 세계관은 의지적으로 사랑의 대상을 추구하고, 삶의 다면적인 모습들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아파하는 까지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렇게 되어야 했다.
물론 기독교 세계관의 체계적인 구조는 그 자체로 매우 소중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체계성은 그동안 그렇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이도록 한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지성적 신앙의 중요성을 교회에 공급했다는 면에서 매우 긍정적이다. 물론 같은 맥락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지적 측면이 강조되었기에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버린 것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문화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접근도 그렇다. 문화의 영적 전쟁에서는 언제나 처절하게 피를 흘려야 할까? 문화를 따뜻한 눈으로 살펴 포섭과 회복의 관점을 강조할 순 없을까? 중요한 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비난을 위한 재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뜻한 비판을 넘어 세심한 보살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삶을 이해할 수 없다.
2012년. 서른을 넘겨 비로소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교회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그렇게 사랑스럽게 보일 수 없었다. 교회에 발을 들인지 십수 년 만의 일이었다. 부끄럽지만 그랬다. 내뱉었던 비판의 말들이 단지 비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교회가 하나님의 신부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다만 신부이기에 더욱 사랑하고 보살펴야 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좀 더 깊게 알아야 했다. 나는 이렇게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비난했고,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로 모인 사람들은 각자의 삶의 빛깔을 가지고 있다. 동일한 신앙고백을 향한 무한히 다양한 사람들의 발걸음. 이들이 걸어온 삶의 궤적은 단 하나의 틀로 해석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세계관이 지성적 측면을 넘어 삶을 포괄하는 전 인격을 대상으로 공동체를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란다.
이런 면에서 동역회 기관지 <신앙과 삶>의 ‘청년, 삶을 고민하다’라는 항목의 글들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교회를 떠나는 청년이 많은 시대에 그들의 생각을 알아가는 의미는 말할 것 없이 중요하다. 더 나아가 그들의 삶, 특히 ‘청년일터이야기’를 통해 삶의 세밀한 한 자락을 들여다보고 소개하는 일은 현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의 ‘사랑’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해준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해야 할 바를 보여주기에 고무적이다. 바라기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싶다. 청년뿐 아니라 더욱 다양한 세대의 삶을, 좀 더 다면적으로 보면 좋겠다. 학자, 박사, 전문직 종사자와 더불어 요식업자, 생산직 노동자, 일용직 근로자, 실직자 등의 삶을 포함해서 말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고단한 학문적 작업, 철학적 물음과 함께 걸어간다.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지식과 모든 총명’이 우리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되도록 기도했다. 기독교 세계관이 교회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섬기는, 그래서 결국 사람들의 삶을 껴안는 위치에 서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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