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대학원생들이 신앙과 삶(학문)의 이원화를 극복하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다. 곧 이 운동은 그리스도인들이 학교, 직장, 가정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로까지 확장되었고, 영성과 지성의 균형 잡힌 제자도에 대한 성경적,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였다. 다만 현재 한국 교회는 양적 쇠퇴기에 들어섰으며, 젊은 세대 이탈의 가속화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로서, 미래 한국 사회의 암울한 지표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젊은 그리스도인 지성들의 진솔한 목소리를 만나는 일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앞으로 더 집중할 사안이 무엇인지를 통찰 받는 기회가 될 것이다.]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김반석, 석종준, 김재완, 류제경, 윤헌준
- 일시 : 2022년 9월 6일(화) 오후 8시 30분
- 장소 : ZOOM 회의실
- 대담 : 윤헌준(숭실대 기계공학부 교수), 류제경(서울대 물리학부 교수), 김반석(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김재완(서울대 인류학과 조교)
- 사회 : 석종준(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석종준 : 선생님들 모두 안녕하세요. 우선 각자 생각하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하 ‘기세운’)이 무엇인지 한 말씀씩 부탁드립니다.
윤헌준 : 저에게 ‘기세운’은 교회와 세상이 소통하는 한 방안입니다. 우리는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각 시대의 영향을 받고, 시대의 문제를 안고 사는 존재인데요. ‘기세운’은 우리가 자기 시대에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가”에 대한 더 나은 성경적 해법을 찾기 위해 계속 세상과 소통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김반석 : 개인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안경의 비유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 안경에 다양한 렌즈가 공존하고 있다고 보구요. ‘기세운’은 그 렌즈들을 바꾸거나 겹쳐보기도 하면서, 무엇이 좀 더 성경적 삶으로 풍성하고 참되게 만드는지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재완 : 저에게 ‘기세운’이란 한마디로 그리스도인 지성 운동입니다. 손봉호 교수님은 2019년 <신앙과 삶>(7+8월호) 창간호의 ‘시선’에서, 19세기 여러 사상의 한복판에 ‘기독교 세계관’이 등장한 맥락을 확인해 주셨는데요. ‘기세운’은 그리스도인 지성들이 각 시대에 좋은 질문을 함께 발굴하고 적절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류제경 : 저는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안경이 되어야 할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결국 ‘기세운’은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아브라함 카이퍼의 ‘영역주권’ 아래서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보면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쓸데없는 싸움을 많이 해 온 것 같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결국 이웃 사랑으로 어떻게 통치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석종준 : 선생님들이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경험하신 한국의 '기세운' 또는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는 어떤 것인가요.
윤헌준 : 저는 학부 때 처음,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IVP) 등 로널드 사이더(Ronald James Sider)의 책들을 접하면서였고요. 정회원으로 가입한 것은 2018년입니다. 현재 실행위원과 <신앙과 삶> 편집위원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김반석 : 저는 학부 1학년 기독인 오리엔테이션 때, 서울대 선배로부터 신국원 교수님의 <니고데모의 안경>을 선물로 받은 게 첫 인연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성경이라는 안경으로 우리 삶의 전 영역을 “이렇게 접근할 수 있겠구나”를 배웠습니다. 또 세상의 학문을 상대화하면서 소화해 나갈 수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리고 2017년 여러 가지 정치적 혼란상 가운데 기독인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중, 석종준 선교사님을 만나 교제하며 위로를 받았고, 이듬해 동역회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김재완 : 저는 총신대 학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기독교 세계관을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목회자 자녀로 자라면서,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특별히 신국원 교수님의 ‘기독교 세계관과 철학’ 수업을 통해서 다양한 학문과 기독교 세계관이 어떻게 연결되고 적용되는지 처음 알았고,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류제경 : 저는 약 12년 전, 카이스트 학생일 때, 기독교학문연구회 학회에서 ‘연구를 삶의 제사로 드리는 방안’이라는 주제로 발표했었습니다. 당시에 로마서 12장 1~2절 말씀을 적용하여 “연구가 삶의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를 처음 접한 일이었고, 최근에는 그리스도인 소장 학자 모임을 통해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석종준 : 한국 ‘기세운’의 성과와 한계를 각자 어떻게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지요.
윤헌준 : 지성도 하나님께 속해야 한다는 것, 하나님을 예배당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찾게 한 것,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일깨워 준 것이 큰 성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선교라는 지상명령과 창조 이야기를 통한 문화명령의 중요성을 함께 일깨워 준 것도 좋았구요. 그러나 그 일깨움이 과연 일상의 영역까지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습니다. 너무 지성인 중심의 운동으로만 자리매김했다는 인상, 따라서 ‘기세운’의 주체와 정의를 조금 더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김반석 : 오늘 대담을 위해 지난 2003년의 기독교 세계관 논쟁 관련 자료들을 좀 살펴보았는데요. 당시에는 시니어와 주니어 사이에 문제의식과 대결 구도가 확연한 측면이 있어보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 5년 동안 만난 시니어들은 그렇지 않았거든요. 생각보다 유연했고, 다름에 대해서도 포용하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기세운'이 나름 자기 갱신을 잘해 온 측면이 있다는 생각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은 중간 세대 층이 너무 빈약하다는 느낌, 지나치게 지성 운동에 머무르다 보니까 사회와 교회의 성경적 변혁에 얼마나 의미가 있는 동력원이었나 하는 점에 대해서는 열매가 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김재완 : 저는 값진 성과로 성속(聖俗) 이원론을 극복할 수 있는 문법(언어)을 제공해 준 것, 그리고 광범위한 그리스도인 학자의 관계망을 구축할 수 있던 것을 들겠습니다. 그러나 동역회는 지성 운동의 핵심 진지로서의 자리매김은 충분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저는 대학원생 독서 모임을 하면서, 총론은 대화가 잘 되는데, 전공과 연결된 각론으로 들어가면, 참여자들의 목마름이 거의 해소되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전공 차원에서도 깊이 있는 고민과 구체적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쪽으로 동역회가 더 섬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류제경 : 중요한 공헌은 성경을 교회 생활 밖의 영역까지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당위적 삶의 지침이나 원리적 방안을 선물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학생 시절 때는 그다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었던 계기는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학회에서 그리스도인 교수님들 앞에서 신앙인으로서 학문에 대한 비전을 발표할 기회가 있었는데, 형식의 문제 때문에 학문적이지 않다는 피드백을 받았었습니다. 그때 저는 학문의 형식을 따지는 학자들 모임밖에는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기세운'이 탁상공론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결국은 아무개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가슴 속에 얼마나 깊이 공명할 수 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고 봅니다.
석종준 : 최근 우리 사회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화두를,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채, 자기만의 이해와 해석으로 남용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히 젊은 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갖습니다. 어떤 말씀을 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윤헌준 : 저는 이것이 각기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달라서 일수도 있겠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특정 이데올로기를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는 데서 혼란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세운'은 오히려 이러한 잘못을 바로잡는 대안이자 통로가 되어야지요. 그러려면 우선 겸손한 자세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김반석 : 관련해서 한국 교회에서 자주 오용되는 말은 ‘인본주의’입니다. 자신은 ‘신본주의’라고 전제하고 어떤 대상을 자신감이 충만해서 공격할 때 사용합니다. 이것이 맞을까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성경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나’하고 다르면 ‘인본주의’라고 합니다. 이중잣대의 착각이지요. 저는 동역회가 이러한 착각과 개념들의 오용을 바로잡는 역할에 좀 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제경 : 이중잣대와 내로남불을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세계관의 다양성을 허용하자고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다른 관점을 배제해버리는 경향을 보게 됩니다. 허용하자면서 허용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적으로는 ‘나’부터 평가받아야 하는데, 먼저 ‘남’을 판단합니다. 우리가 갈등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각자 더 겸손해질 수 있을까 질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석종준 : 한국 '기세운'의 시작은 1980년대 초, 신앙과 삶, 신앙과 학문의 이원화를 극복하려는 대학원생들의 자발적 독서 모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힐까요? 이 시대에도 그러한 모임들이 활성화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김재완 : <신앙과 삶> 창간호(2019년 7+8월)에 실린 황영철 목사님(수원성의교회 담임목사, ‘기학연’ 첫 세대)의 글을 보면, “당시 참여자들은 그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뭔가 새로운 역사를 열어간다는 흥분이 있었다”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즘 모임에는 학생들이 막막함을 더 많이 느끼는 듯합니다. 이유는 1980년대와 지금의 풍토 차이도 있겠지요. 그러나 어느 교수님을 초청해서 함께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는 그리스도인 연구자로서 먼저 고민을 어떻게 해 왔는지를 이야기 들으면서,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한 기회가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김반석 : 개별 학문에서 부딪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자연과학이든 인문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최신 담론 등을 접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데요. 그때 고민을 앞서 했던, 비슷한 전공의 그리스도인 교수님과 만나 교제할 수 있다며 분명 유익할 것입니다. 꼭 교수님이 아니더라도 저의 경우는 캠퍼스에서 비슷한 고민을 할 때, 석종준 선교사님과 만나 미셀 푸코 등을 신앙 이야기와 함께 나누며 도움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석종준 : 신앙과 직장, 신앙과 학문의 이원화 극복 문제는 학자들에게도 동일한 과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우리 류제경, 윤헌준 두 분 교수님은 어떤 생각이신지요?
윤헌준 : 저는 균형감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너무 형식에만 집중한 나머지 때로 복음이 건조해진다”라는 스탠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의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선교사로서 세상의 언어로 세련된 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균형을 잃지 않는 지혜는 성육신에 내포된 진리의 핵심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19세기 기독교 변증으로써의 기독교 세계관을 유산으로 받았지만, 그 형식의 계승에만 집착해 정작 삶이 무미건조해져서는 안됩니다. 이원화 극복의 핵심은 참 신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즉 성육신적 가치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하나님 없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성숙한 세상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류제경 : 결국 영향력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과학자이기 때문에, 전공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전공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세상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무엇을 성경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느끼면, 피하지 말고 오히려 진리로 무장되어서 세상의 본진을 꿰뚫는 논리를 준비하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번은 믿지 않는 친구와 신앙인으로 민감한 이슈를 같이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근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반감이 있는 친구였는데, 제가 기독교 이야기 이전에, 가정에 대해 말하면서, “나는 가정은 절대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을 때, 그 친구가 납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물론 이런 식의 대응이 모두에게 통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세상 사람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논리를 우리가 준비하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탁상공론이 되지 않는 '기세운'으로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우리 시대는 다원성을 존중하는 흐름 속에 있고, 따라서 동역회를 비롯한 여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복음주의 신앙을 공유하더라도, 한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입장이 공존하고 있음을 봅니다(창조론, 동성애, 배제와 포용 등). 이러한 공존과 성경적 진리 추구는 양립이 가능한 것일까요?
류제경 : 저는 일단 양립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우리는 같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안에 대해 논쟁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 천년왕국, 동성애 등. 여기서 가장 필요한 것이 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 의견이 맞다고 내가 동조하는 것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는 나와 너 중 누가 참이냐를 따지기 위해 토론하는 성격이 강합니다. 제가 네덜란드에서 박사 후 과정을 하면서 배운 것은 토론의 목적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내 입장을 잘 전달하는 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윤헌준 : 또 하나는 ‘성경적 진리’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복음주의, 즉 성경의 절대적 권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믿고 있다면, 그다음은 교단이나 신학적 입장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강조점의 다름을 다양성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위에서 서로 존중하는 것은 진리에 대해 타협이 아니지요. 사도행전 15장에서 히브리파 그리스도인인 베드로가 헬라파 그리스도인들과 소통한 후 유대인과 이방인 장벽을 허문 사건이 시사점을 준다고 봅니다(행 15:7~8). 즉 어떻게 양립이 가능할지의 문제는 우리가 토론을 결론 산출의 자리가 아닌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보면서, 서로 보완해 줄 수 있다는 열린 생각을 가질 때 해소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김반석 : 두 분의 토론에 관한 말씀 인상 깊게 들었습니다. “나는 너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지만, 네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는지는 잘 알 것 같다.” 여기서 끝낼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서투름을 극복할 필요가 있겠지요. 우리가 같은 복음을 붙들고 있다면,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문제인데요. 제가 극단적 우파 입장에 치우쳐 있는 스피커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어느 쪽의 주장을 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럴 수 있지요. 가령 동성애 등의 문제에 대해서 특정한 입장을 강하게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코 동의가 안 되는 지점은 “좌파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라는 식의 주장입니다. 우파, 좌파라는 것은 굉장히 상대적인 개념이고요. 복음주의 신앙 고백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단지 자기하고 입장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마르크스의 추종자’로 규정하고,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너는 기독교인이 아니야”라고 하는 것은 정말 큰 문제이고 잘못된 폭력입니다.
김재완 : 기본적으로는 앞의 선생님들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적어도 복음주의 기독교 신앙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면, 세부적으로는 서로 다른 입장,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틀림이 아닌 다름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전도사 출신 인류학도인데요. 학과에서 스님 출신 인류학도와 이야기를 종종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생각보다 대화가 잘 되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종교성’, ‘성직자’에 대해 이야기를 보았는데,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하물며 같은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교단이나 세상 문제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고, “네가 틀리면 내가 맞고, 네가 맞으면 내가 틀린 것”이라는 식의 접근은 잘못되었습니다.
석종준 : 한국교회의 청년 세대 이탈률은 심각합니다. 최근 어느 대학원생은 자기 연구실 학생 25명 중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단 2명이라고 하더군요. 캠퍼스에는 여전히 여러 선교공동체가 활동하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동역회는 어떤 섬김을 할 수 있을까요?
류제경 : 하나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 밖 사람들과 다를 바 없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은 것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가 확실하지 않다 보니까 결국은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문제, 신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한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상황 변화에 따른 세속화의 물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윗세대는 배고픔, 전쟁 등 엄청난 고난과 난관을 겪었지만, 그것을 신앙과 연결해서 극복했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기본적으로 등 따습고 배부르니, 내 힘으로 살 수 있다는 착각에 세상이 미혹하는 죄성(罪性)의 굴레에 빠진 측면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김재완 : 동역회가 캠퍼스 청년들을 잘 섬길 방법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지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류학도로서 한국 교회에 양적 부흥의 시대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지만 앞으로는 계속 쇠퇴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잘 쇠퇴할 것이냐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성장에서 쇠퇴라는 완전히 다른 역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우리 신앙을 알맞게 재구성하고 기독교의 본질과 진리를 붙잡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동역회는 이때 캠퍼스에서 탁월한 기독교 지성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섬김이 필요합니다. 이 사회와 교회에 적절한 질문거리를 발굴하여 제시하는 것이 핵심이고, 캠퍼스 선교단체와는 구별되는 동역회만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한국 교회의 쇠퇴는 현실 비관이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소수이고 약할 때 오히려 가장 큰 힘을 발휘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쇠퇴하는 한국 교회는 역설적으로 군살과 거품이 빠진 상태에서 본질을 더 잘 추구할 수도 있는 기회입니다.
김반석 : 청년 세대의 이탈은 시대 변화도 관련이 있겠지만, 교회의 책임이 크지 않나 생각합니다. 한국 교회의 쇠퇴는 유럽 교회와 다른 점들이 있습니다. 유럽의 경우 세계 대전 같은 역사적 사건이 큰 원인일 수 있지만, 한국 교회는 자기 잘못으로 무너지고 있는 면이 적지 않다고 봅니다. 교회가 현재 젊은 세대의 고민에 제대로 답을 주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즘 청년 세대가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교회에서 해답과 소망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떠나간 측면이 굉장히 강합니다. 이때 동역회 구성원들이 자기 신앙을 지키면서도 세상과 호흡하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세상과 청년 세대는 다시 반응하고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윤헌준 : 저는 19세기부터 이어온 기독교 세계관 렌즈를 바꾸어볼 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 렌즈로만 이 시대 문제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란 한계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 세계관의 담론을 성속(聖俗) 이원론 극복이라는 방향으로만 고집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속화 문제를 경계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는 가르침은 지난 ‘기세운’의 공헌이라고 봅니다. 창조신앙에 기반한 문화명령의 사명이지요. 그러나 이것도 잘못 적용되면, 세상에서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창조신앙을 번영신앙으로 바꾸고, 세속화를 ‘삶의 예배’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는 오용도 심히 경계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저는 최근 캠퍼스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떠나는 이유도 공적 예배의 가치가 희미해지고, 성례전이 약화된 것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런 면들이 없는지 다시 되짚어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젊은 그리스도인로서 현재 한국 교회에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재완 :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기는 끝났습니다. 저의 책, <나는 일하는 목회자입니다>(2022)에서도 강조한 부분인데요. 우선 이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 현실을 직시한 다음 우리의 신앙 고백과 실천방안을 다시 들어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확실히 겸손해질 수 있고, 훨씬 더 빠르고 적실한 대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반석 : 세대교체도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다음 세대’ 많이 이야기하는데요. 그저 기성세대의 유지를 받들어줄 세대의 의미로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재평가 하려 하면 “건방지다. 어떻게 하나님의 유산을 비판할 수 있냐”라는 식입니다. 최근 제가 경상도 고향에 갔다가 충격을 받았는데요. “코로나 시대와 4차 산업 혁명 시대”라는 주제의 세미나 포스터를 보니까 20년 전 활동했던 목사님들이 그대로 강사로 올라있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어떤 추억을 계속 붙잡고 가려다 보니까 지금의 한계가 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제는 성장기 이후의 시대를 고민할 수 있어야 하고, 다음 세대들이 주도적으로 대비할 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해 주셔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윤헌준 : 저는 3040 세대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혼부부, 싱글 청년, 아기를 둔 부모 세대인데요. 5060 세대는 “왜 남선교회 안 올라오냐”라고 압박하고, 20대 청년들은 “‘낄끼빠빠’도 모르고 왜 계속 같이 있냐”라고 합니다. 이 ‘낀 세대’를 한국교회가 잘 품고 설 자리를 시급히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빨리 끌어다 봉사시키려는 방향보다 이들이 왜 교회에서 힘든지 역지사지 입장에서 이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갈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류제경 : 첫째, 리더십 문제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고 있는 것은 평신도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세간의 초점은 리더십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더십 훈련이 안된 분들이 이끌다 생긴 문제이기에 동역회가 한국교회 리더십 훈련을 10~20년 이상 내다보고 어떻게 섬길 것인지 더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 가정의 붕괴를 막아야 합니다. 이혼율 증가, 출산율 저하, 비혼율 증가 등.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저는 동성애 문제도 가정 회복과 많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데요. 아쉬운 것은 동역회 학술대회에서 가정에 대한 이슈를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교회 봉사만 잘하면 신앙이 좋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봉사와 가정의 균형을 깨뜨리고, 교회 봉사만 하나님의 일이라면서 열심히 하고 가정을 등한시 여기다가 가정이 무너진 경우를 종종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러면 다음 세대로 신앙이 연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석종준 :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시니어 리더들(목사, 교수, 학자 등)에게 한 말씀씩 자유롭게 부탁드립니다.
김재완 : 우선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어려운 시기를 걸어오시면서 젊은 세대가 무엇을 붙잡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멋진 본을 보여주신 신국원 교수님께 감사합니다. 다만 우리는 위기 속에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다양한 협력을 통해 위기를 더 잘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협력에는 단연 시니어 세대와 젊은 세대의 협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협력을 위해 젊은 세대에게 열린 마음을 가져주시고 발언할 지면과 기회를 주시고 더 많이 의견을 청취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윤헌준 : 우리 젊은 세대는 자기들의 고민과 아픔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면서, 때로 방패와 보호막이 되고, 함께 눈물도 흘려주는 어른들에 목말라 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거짓말, 즉 우리 사회는 원래 이러저러하니 너희가 조금만 더 인내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 고문이 아니라, 사회에 왜곡된 것을 조금이라도 덜 휘게 만들어서 물려주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을 부탁드립니다. 그 가운데 때로 애정을 담은 질책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류제경 : 감사하지요. 다만 시니어 세대가 만드신 문제는 가급적 당대에 잘 마무리 해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여러 신앙 단체들을 이끄시는 시니어들의 갈등으로 젊은 세대가 상처를 받게 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따르신다면 먼저 십자가를 지고 용서하며 사랑으로 그 무너진 갈등을 해결해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역사가 계속 갈등의 역사로 반복이 되는 것 같은데, 그런 갈등의 역사를 저희 세대가 이어가지 않도록, 끊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김반석 : 저는 다음 세대가 다른 세대일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다음 세대를 키운다는 의미가 기존 것을 그대로 전수하겠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요. 물론 신앙의 핵심은 계승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똑같이 만들려는 생각은 안 된다고 보고, 그것을 굉장히 두려워합니다. 세대교체라는 것은 어쩌면 기존 세대를 다음 세대가 밟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측면도 인정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지금의 젊은 세대는 양적 성장기가 아닌 쇠퇴기라는 역사적으로 다른 맥락에 서 있다는 것도 그대로 인정해 주시고 응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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