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최근 교계 여러 곳에서 청년 세대 관련 컨퍼런스 및 세미나를 열고 있다. 선교단체 간사로서, 대학생을 만나는 필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흐름은 감사한 일이다. 다음 세대와 대화를 하려면 그들을 알아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력은 정작 청년들이 가장 관심 있어 하는 영역을 보지 못하고 있으니 바로 MBTI로 대표되는 성격유형 검사이다. 청년들은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에서 MBTI 결과를 공유하며 이와 관련된 ‘밈’(meme)도 끊임없이 생산하고 ‘좋아요’와 ‘댓글’을 달며 하나의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다. 청년들과 SNS에서 DM을 하며 공감 하트를 누르는 30대 직장인(간사)으로서, 이 트렌드가 어떠한 사역적 함의를 가질 수 있을지 생각을 나눠볼까 한다.
청년들은 왜 MBTI에 열광할까? 곽은진 교수는 청년세대가 인간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며 타인을 알아가는 대신, 간편하게 규격화된 정보를 얻어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고효율성을 추구한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실 가능만 하다면 누구나 그러고 싶지 않을까? 그런데 이들은 핸드폰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디지털 네이티브이며, 또 사람을 만나기보다 혼자 있는 비대면 시대를 지낸 세대이다. 그러니 미스터리 같은 인간관계를 단번에 간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검사가 이 세대에게 인기를 끄는 것이 마냥 이상하지만은 않다. 이 메커니즘은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것에도 해당된다. 자신을 정직하게 직면하고 성찰하며 자신을 알아가는 것은 인내를 요구하나 MBTI는 이러한 수고를 제한다.
MBTI와 같은 성격검사의 등장은 몇번의 터치로 자신과 타인을 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하지만 그러한 확신 속에서도 한계가 있다. 자신의 성향을 알고 타인의 성향을 안다 해서 각자의 허물이 이해되고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을까? MBTI 열풍은 이 지점에서 흔들린다. 많은 청년들이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스스로를 용서하지도, 타인에게 너그럽지도 못한다. 오히려 성격 유형에 따라 벽을 쌓는다. 상호 이해와 사랑보다 자기방어와 타자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 그렇기에 이 안에는 평화가 없다. 평화는 사랑에 근거한 용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시 복음이 답이야”라고 성급히 결론에 도달하지 말자. 우리는 물어야 한다. 교회는 개별적 존재로서 ‘용납’ 받기 원하는 자들을 받아줄 준비가 되어있는가?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다양한 성향을 너그럽게 받아주고 있는가? MBTI 성향 중 ‘외향성’과 ‘내향성’의 관점에서 보자. 복음주의 기독교는 신앙의 좋고 나쁨을 ‘관계적 열정’으로 평가하려는 습관이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친화력이 좋아야 하고 언변도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리더십과 다양한 교회 행사에 참여하는 성실함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누군가가 내향적인 성향으로 이런 분위기를 거절하면 어떻게 될까? 많은 경우 그는 어려운 사람, 적응 못한 사람, 나중에는 공동체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인식된다. 그렇다면 그 내향적 성향의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성향을 창조하셨으며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동체 안에서 경험할 수 있을까? 이 사랑에 근거한 용서를 경험해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애석하게도 이러한 성찰은 필자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필자가 담당하는 공동체는 오랫동안 외향적 성향이 강한 공동체였고 내향적 지체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한 멤버가 고충을 토로했으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고, 그 친구는 결국 소외되어 공동체를 떠나는 상황에 이르렀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관계는 회복되었으나, 이는 공동체를 향한 그의 진실된 사랑 때문이었지 외향적인 우리의 outreach 때문이 아니다. 외형적 모습이 답은 아니다. 그리고 내향적 모습이 공동체의 결속을 저해하지 않는다.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러한 원인들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소개팅 자리에서 MBTI부터 얘기하는 이 세대의 특징을 우리가 무시할 수 없다. 왜 이것에 열광하는지 이해해야 하고 그들의 필요에 반응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적으로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며 물어야 한다. 다양한 성격유형의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곳인가? 혹시 내향적, 혹은 역으로 외향적 사람들이 적응하기 힘든 곳은 아닌가? 특정 성향의 사람에게 편한 모습을 절대적 선으로 획일적으로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우리 지체들의 경험을 물어보자. 그들에게 이 공동체가 안전지대인지.
혹 이런 연유로 교회를 떠난 지체들이 있다면, 어떻게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시 초대하며 환대할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전에 유대인과 이방인이, 혹은 노예와 귀족이 함께 식사를 한 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면, 2022년 현재는 어쩌면 E와 I가 그 누구도 배제되지 않은채 즐겁게 모이는 모습이, 혹은 N과 S가 함께 앉아 공동체의 방향을 논하며 서로를 더 낫게 여기는 모습이, 혹은 F와 T가 함께 자신들의 연약함을 고백하며 상대의 권면을 듣는 모습이 이 시대에 큰 충격과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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