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변론 하나. 호모욕쿠스 - ‘욕’해야 사는 인간
사람은 욕을 하고 산다. 육두문자 욕을 하든 점잖은 말로 비판을 하든 우리는 모두 욕을 마음과 입에 달고 산다. 욕에는 남을 욕하는 것, 세상을 욕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욕하는 것이 있다. 욕의 주체에도 개인적 욕과 집단적 욕이 있다. 정치는 다른 정견의 집단끼리 욕하며 싸우는 것이요, 몇 년마다 돌아오는 선거는 국민들이 패를 나눠 벌이는 주기적 욕 잔치이다. 집단적 욕이 농축되면 정치적 양극화가 나타난다.
변론 둘. 당파싸움이 나쁘다는 오해
상식적인 말의 상당수는 옳지 않다. “당파싸움은 나쁘다”라는 생각이 그렇다. 모든 사람이 균등하다면 당파도 필요 없고 싸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동등하거나 균질하지 않고, 경제·정치적으로 여러 다른 이해관계 속에 존재한다. 그 다른 이해관계만큼 당파가 있고 정파가 있고 다른 정치적 의제가 있다. 따라서 당파적인 논쟁과 분쟁은 없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있는 것이 좋다.
한 집단, 정당이 보수, 진보를 아울러 모두에게 가장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아니오”이다. 국가의 이익과 노동자의 사회주의적 이익을 통일시켰다는 히틀러의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은 민족의 이름으로 독일 민족 전부를 동원, 역사 최악의 집단적 범죄를 저지르게 했고, 부자 계급을 없애서 ‘평등하고 동등한 만민의 이상사회’를 만들려던 소련 공산주의의 시험은 처절하게 실패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마 5:44)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삼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정치적 원수와의 공존’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능해진다. 공동체 사회 안에서 우리는 정치적 원수들을 사랑(?)하며 살아간다. 어떻게? 꼴 보기 싫지만 참고 견디며, 죽어라 욕하면서도 해치지는 않고 같이 살아가는 방법으로.
변론 셋. 당파적 공익과 비당파적 공익
민주주의에서 50대50 또는 40대60으로 대립하는 당파적 견해는 각각 그 비율의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현실적 이익과 합리적 요구를 반영하는 ‘당파적 공익’으로 존중될 필요가 있다. 경기에서 각 팀의 ‘승패’는 50대50의 당파적 이익을 가지나, 경기의 ‘규칙’을 지키는 것은 양 팀 모든 활동을 가능케 하는 100%의 ‘비당파적 공익’이 된다. 민주주의 선거의 공정성, 적법절차의 준수는 ‘당파적 공익들’ 사이에 싸움을 가능하게 하는 더 큰 차원의 ‘비당파적 공익’에 해당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당파적’이라고 해서 ‘사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도 엄연한 ‘공익’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회에 존재하는 계층적 이익을 주장하는 것은 ‘사익’이 아니고 집단적인 ‘공익’을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이 노동조합의 노동쟁의를 ‘사익’으로 취급하고 배척하고 금지하려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노동삼권은 헌법 제33조가 인정하고 있는 헌법적인 ‘당파적 공익’이기 때문이다. 성장과 효율성을 주장하는 보수 쪽의 ‘당파적 공익’ 주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보수의 논제는 기득권의 벌거벗은 이익 추구로 보이기도 하지만, 경제적 안정과 성장의 요구에는 ‘인간의 애처롭고 끈질긴 생존 욕구’와 관련하여 필수 불가결해 보이는 요소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파적 싸움’과 ‘당파적 공익’이 존재하면서 대립하고 통합되는 변증법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세상과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유익하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기가 놓인 자리와 자기의 주관과 가치관에 따라서 자기의 주장을 떳떳하고 투철하게 주장할 자유와 권리와 의무와 사명감을 가진다. 내 주장이 100% 옳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반영하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만들 필요도 없다. 여기에 당파적 공익의 거대한 자유가 있다.
변론 넷. 당파적 공익에도 한계가 있다
당파적 이익의 주장에도 ‘선’(線)을 넘어서는 안 될 신앙적 및 사회적 한계는 있다. 그 선은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과 그 역사적 성취인 민주주의 헌법 제도 안에 새겨있다.
‘죽이지 말라’(제6계명), 당파적 공익의 주장은 ‘내가 살기 위한’ 정당한 노력이다. 그러나 내가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총알로 죽이지 말고 투표로 싸워라(민주주의 선거제도). 이것이 당파적 공익이 넘어서는 안 될 첫 번째 선이다. ‘훔치지 말라’(제8계명). 계층 간에 경제적 이익은 팽팽하게 대립하며 서로가 상대방을 도둑이라고 욕한다. 나(우리)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남(그들)은 다 도적이 된다. 과연 그럴까, 나(우리)의 생각과 행동과 정치적·경제적 노력이 다른 계층의 경제적 권리와 일용할 양식을 해치는 도둑질이 되지는 않을까? 이것을 자문하지 않는 당파적 이익은 쉽게 당파적 절도로 추락한다. 이것이 당파적 공익이 넘어서는 안 될 두 번째 선이다. ‘거짓 증거하지 말라’(제9계명). 당파적 대립의 감정이 농축되면 상대 진영에 대한 집단적 욕과 공격이 난무하게 된다. 우리는 본성상 욕해야 사는 인간이니 세상에서 집단 간의 욕 싸움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욕에는 한계가 있다. 정당한 자기주장과 자기변호는 허용되는 정의이지만, 이것을 넘어 ‘이웃에 대하여 거짓된 증언과 거짓된 심판을 하는 것’은 세상의 법정을 넘어 하나님의 법정에서 반드시 계산해야 할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당파적 공익이 넘어서는 안 될 세 번째 선이다.
“선과 악을 아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창 3:17). 사람이 스스로 선악의 심판자가 되지 말라는 하나님의 첫 명령이다. 아담과 이브의 잘못이 인류의 원죄가 되어 우리는 모두 매일, 매달, 매년, 아니 평생 다른 사람과 집단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선악과 중독 증상에 시달린다. 일반 사회인들이 정치적 선악과에 중독되었다면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선악과와 종교적 선악과를 함께 복용한 합병증으로 더욱 거칠게 하나님께 반항하고 있다. “너 자신을 돌아보고 결코 하나님의 심판자 자리에 앉지 말라.”(약 4:11) 이것이 당파적 공익이 넘어서는 안 될 네 번째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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