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비슷한 현상을 가리키는 다양한 인문사회학적 용어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교육(education), 학습(learning), 훈련(training)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인간이 인간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일과 연관이 있고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현상의 서로 다른 부분을 부각하여 드러낸다.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간의 상호 주체성과 인격적인 교류 및 성장을 함의한다. 학습은 소위 학습자 중심의 세련된 교육 담론을 상징하면서도, 과도하게 개인을 주체로 내세워 학습 결과의 책임까지도 학생에게 묻게 될 우려가 있다. 반면 훈련은 철저한 반복 숙달을 통해 집단 구성원들의 행동을 바꿀 수 있지만, 과도하게 집단 또는 상급자를 주체로 내세워 비인격적인 모습으로 흐르게 될 우려가 있다.
최근 필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훈련을 받았다. 박사과정 전문연구요원으로 대체군복무를 하던 중 지난 9~10월에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일이다. 남들 다 가는 군대를 잠깐 다녀온 것이 무슨 대수인가 민망하기도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 의미가 작지만은 않았다. 서른쯤 되어서 훈련소를 다녀왔다는 사실은 물론이고, 2011년에 대학에 입학한 이후 학교와 교회를 2주 이상 비우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분들께서 필자가 훈련소를 다녀온다는 말에 진심 어린 걱정과 기도를 해주셨다.
책상 앞에만 앉아 있던 사람이 머리를 밀고 군복을 입고, 단체 생활을 하며 흙바닥에서 구르는 여러 경험들은 참 강렬했다. 그중에서도 눈을 질끈 감고 말았던 기억은, 정훈교육 이후 ‘장병참여형 교육’이라며 전지에 크레파스, 색연필 따위를 나누어 주고 오늘 배운 것을 4~6명이 조를 이루어 그림으로 표현해보라고 했던 일이다. 나름대로 교육학 박사랍시고 그토록 공부하고 연구했던 협력 학습 이론이 머릿속에서 좌르륵 펼쳐졌다. 10대 학생들을 위해 협력 학습 수업 프로그램을 짜던 내가 서른쯤 되어 거꾸로 그 대상이 되었으니, 내가 진행하던 연구에 참여해주었던 학생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훈련소 안에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목사님의 이야기를 많이 묵상하였다. 교회 공동체를 생각하며 본회퍼 목사님의 <성도의 공동생활>과 메탁사스(Eric Metaxas)가 저술한 본회퍼 목사님의 전기 <Bonhoeffer: Pastor, Martyr, Prophet, Spy>를 읽은 터였다. 또 대학에서 자유로운 20대 학생들을 많이 만나는 편인 필자로서는 군대에서 통제되는 20대 장병들을 보는 일이 여간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이처럼, 훈련소에서의 시간들은 교회라는 공동체와 캠퍼스라는 터전이 이토록 강력한 체계로 조직화된 군대와 어떻게 같고 또 어떻게 다른가를 고찰할 좋은 기회가 되었다.
메탁사스에 따르면, 본회퍼 목사님의 삶과 사역을 관통하는 핵심 질문 역시 “교회란 무엇인가?”였다. 본회퍼는 영국, 스페인, 스위스, 그리고 미국 교회에서의 경험을 통해 독일교회의 현실을 바라보았다. 특히 유니온 신학교의 자유주의적 풍조와 백인 교회는 그를 실망시켰지만, 오히려 흑인 교회에서의 강렬한 예배의 경험이 그를 일깨웠다. 미국에서 흑인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일을 본 그는 독일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당한 일의 본질을 직관하게 되었다. 수년 후, 히틀러에 맞서는 고백교회의 리더인 그를 친구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미국으로 보냈으나 그는 26일 만에 그의 조국 교회와 동지들을 생각하다 못해 귀국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더 본격적으로 히틀러 암살 작전에 참여하고, 결국 순교하게 된다.
훈련소에서 본회퍼 목사님을 통해 배우게 된 하나의 키워드가 있다면 예수님의 산상수훈적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신앙생활은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에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는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이, 그동안 꽤 ‘수동적-소극적’이었던 필자의 신앙관을 ‘능동적-적극적’으로 바꾸고야 말았다. 그래서일까, 하나님의 은혜로 필자는 훈련소 안에서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당당히 고백할 수 있었고 코로나19 감염으로 아픈 이들을 위해 기도해줄 수 있었다. 지금 필자는 전에 없이 많이 기도하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전도와 선교라는 단어들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다.
웨슬리 웬트워스(Wesley Wentworth) 선교사님의 귀국이 코로나19로 인해 다소 늦추어졌다. 감사하게도 선교사님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찾아뵐 기회를 얻었다. 홍대입구역 IVP 사무실에서 만난 선교사님은 필자를 반겨주신 뒤, 몇 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질문을 하셨다. “요즘에 어떤 책을 읽고 있니?”, “요즘 서울대의 그리스도인 그룹에서는 어떤 활동을 하니?”, “너의 전공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과 연결시킬 거니?”,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좋은 책들을 대학 도서관에 비치하도록 해야 해.” 필자는 그가 1965년 처음 한국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같은 질문을 해 왔음을 직감했다. 어떻게 한국에 선교사로 오실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20대 때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에 순종했다고 담담하게 대답하셨던 순간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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