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9세기 말 네덜란드에서 일어난 칼뱅주의 부흥 운동은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직접적인 원천이다. 칼뱅주의는 ‘삶이 곧 종교’(life is religion)라는 원리에 따라 문화를 성경의 진리에 따라 변혁하려는 열정을 특징으로 한다. 그 전통을 되살려내려는 운동의 중심에 ‘작은 거인’이라 불리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있었다. 그는 네덜란드인 평균 신장보다 ‘작은’ 사람이지만 정통 신앙을 회복시킨 영적 ‘거장’이었다. 더 큰 업적은 그 신앙에 함축된 문화 변혁적 세계관을 드러내어 삶을 바꾼 실례를 남긴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논의도 그 역사를 본받아 삶을 성경의 진리에 더 부합하도록 만들려는 실천적 노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을 4회(<신앙과 삶> 2022년 5+6월호, 7+8월호, 9+10월호, 11+12월호)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1회에서는 기독교 세계관과 관련된 논의에 대해 살펴보았고, 2회에서는 시대정신에 맞선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을 알아보았으며, 3회에서는 신(新)칼뱅주의에 해당하는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마지막 4회에서는 오늘날 ‘공공신학’의 원조 격이 되는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을 고찰한다. |
카이퍼는 총체적 삶의 체계로서의 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의 기틀을 세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목회자와 신학자로서 역사적 정통 신앙의 회복을 통한 교회 개혁 운동을 이끌어 젊은 나이에 이미 큰 영향을 끼쳤다. 카이퍼는 당시 기독교 공동체가 처한 위기 상황을 헤쳐나갈 길은 성경적 삶의 원리인 칼뱅주의를 삶의 모든 국면에서 실제적인 규범으로 삼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무엇보다 먼저 교육과 정치 개혁운동의 기초로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한 것이다.
카이퍼는 목사직을 내려놔야만 하는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설교, 언론, 교육, 저술을 통해 폭넓은 사회운동에 매진했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들어서고 반혁명당을 조직한 것도 이 확신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듯 그는 목회, 교육, 언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운동을 통해 총체적 삶의 체계로서의 비전에 따라 사회와 문화를 변혁하려 애썼다.
특히, 당시 중심적 대중매체인 신문을 통해 오피니언 리더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카이퍼는 일간지 스탄다르트와 주간지 헤르아우트의 편집장으로 40년 넘게 거의 매일 글을 썼다. 기독교 정치 원리를 제시한 <우리의 계획>을 시작으로 <일반은총>과 <왕을 위하여> 등 200권이 넘는 책은 모두 이 신문들에 쓴 글을 주제별로 묶은 것이다. 오늘날 카이퍼는 이른바 ‘공공신학’ 또는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의 원조로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근래에 12권으로 된 그의 주요 저작이 번역되어 출판되고 있다.
카이퍼의 ‘공공신학’ 원리의 중심에는 ‘하나님 주권’ 사상이 있다. 우주의 주권자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이기에 모든 권력은 그 분에게서만 나와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회계약설, 민중주권설, 국가주권설에 대치되는 사상이다. 국가는 죄악을 억제하기 위한 일반은총의 산물이지만 국가에는 개인의 자유를 억제하는 권력 남용의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는 하나의 특정 정치 형태를 두둔하지 않는다. 물론, 그는 위정자의 전횡을 막아 시민들의 권익을 보호할 의회제도를 지지한다. 또한 삶의 여러 영역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영역주권 사상에 입각하여 콘스탄티누스적 국교주의를 반대하면서, 교회와 국가가 서로 도와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해야 함을 강조한다.
카이퍼는 칼뱅주의가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비잔틴의 성 소피아 성당,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같은 건축물을 남기지 않은 것은 신앙원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화려한 예배 양식이나 거대한 건물로 신앙을 표현하는 일을 배격하면서, 오히려 감각적인 형식에서 해방하여 영성을 일깨우는 데 전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술을 교회에서 해방하고 독립적 지위를 인정한 것은 칼뱅주의라고 밝힌다. 이로써 교회의 후견을 벗어나 자체의 원리를 따르는 참된 기독교 예술이 생겨나는데, 이에 대한 좋은 사례로서 풍부한 예술세계를 창조한 렘브란트를 든다.
이처럼 잊혀졌던 칼뱅주의 신앙에서 기독교 세계관과 이에 기초한 문화적·사회적 활동의 원리를 이끌어낸 것은 카이퍼의 공로임에 틀림없다. 이는 자유주의적인 ‘실천적’ 그리스도인과 경건주의적인 ‘신비주의’ 그리스도인으로 분열되어 인본주의 사상에 대처하지 못하던 당시 교회 현실에 대한 처방이었다. 카이퍼는 학문과 예술 그리고 정치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영역이 어디에도 없으며, 따라서 성과 속을 구분하는 그 어떤 이원론적 사고도 성경적이 아님을 역설한다. 나아가, 칼뱅주의의 부흥이 비성경적 이원론의 폐해 및 자유주의와 인본주의 사상의 홍수를 막을 대안임을 주장한다. 그의 통찰은 21세기 세속화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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