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18세기 말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세계관 개념은 어느덧 오늘날 한국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도 깊이 들어와 있다. 세계관 개념이 가진 포괄성과 효용성 때문인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문 활동을 하는 곳에서 세계관 개념이 사용되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세계관 개념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데는 현대 북미 복음주의 신학자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에게 영향을 준 19세기 네덜란드 개혁파 신학자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다보니 독일과 스위스에서 활동했던 20세기 대표적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가 <교회교의학>에서 전개한 세계관 개념에 대한 신학적 비판은 충실히 소개되지 못했다.
바르트는 세계관을 추상적이고 억압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개념으로 보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바르트의 세계관 비판에 제임스 오어나 아브라함 카이퍼, 헤르만 바빙크 같이 오늘날 통용되는 기독교 세계관 개념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장로교 혹은 개혁파 성향의 신학자들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19세기 말 독일의 문화개신교주의에서 있었던 기독교의 세계관화를 우선적으로 문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바르트의 세계관에 대한 비판은 세계관 투쟁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고 폭력을 정당화했던 독일의 나치 시대, 그리고 세계관을 가지고 체제 경쟁을 동서 냉전 시대에 이뤄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리 말하면, 바르트의 세계관 비판은 기존의 세계관 개념사 연구가 미처 보여주지 못한 강한 정치신학적 함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세계관에 대한 바르트의 비판은 창조론과 화해론이라는 교리적 맥락 속에서 전개된다. 창조론을 다룬 바르트의 <교회교의학>(III권)이 1940년대 세계대전 중에 집필되었고, 화해론을 다룬 <교회교의학>(IV권)은 1950년대 악화 일로를 걷던 동서 냉전 체제를 배경으로 탄생하였다. 시대적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신학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려던 신념에 따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특정한 정치적 상황과 노골적으로 연관 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르트의 세계관 비판이 전체주의 시대에 세계관이 정치 이데올로기처럼 사용되며 폭력을 정당화하고 부추기던 시기에 맞물려 등장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은 세계 전체에 대한 특별한 상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세계관이 인간으로서 세계의 일부로서 살기 위해 불가피하지만, 세계관은 주체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를 경직화하고 심지어 절대화하려는 특성 때문에 문제시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회교의학>에서 바르트가 세계관 비판에서 사용한 기본적인 신학적 논리는 그가 자연신학을 비판하면서도 사용했던 교의학적 주제와 상당 부분 중복된다. 신학계에 잘 알려져 있듯 자연신학에 대한 바르트의 거부는 게르만의 역사와 혈통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통로라던 나치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르트의 세계관 비판 역시 개신교 역사에서 주목하며 볼 만한 정치신학적 모델이라고 그 의미를 평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바르트는 세계관 개념에 대해 신학자로서 단지 이론적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다. 그는 확실성과 총체성을 추구함으로써 타 세계관과 갈등을 일으키는 특성이 있는 세계관이 정치·사회적 혼란 상황에서 폭압적 도구로 기능할 위험까지 문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핵심에는 특정한 관점 내지는 세계관에 따른 종교적·윤리적 신념에 대한 정당화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되고 현실화 된 창조 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급진적 사랑이 있다. 복음은 한 인간의 사상의 틀이 다른 인간의 사상의 틀에 대해 거둔 승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죄와 죽음으로부터 승리라는 사실로부터, 바르트는 세계관이 가진 경쟁적이고 비타협적인 본성에 한계가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기독교적 신념과 행동을 연결하고 신앙적 관점에서 여러 학술적 활동을 펼치려는 좋은 의도일지라도 세계관이라는 언어가 과도하게 사용되면, 확실성과 총체성을 추구하는 세계관 개념의 특성상 갈등이 조장될 위험이 있다. 심지어 타자에 대한 조직적 길들이기와 폭력을 정당화하고자 세계관이 옹호되는 일까지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성서의 가르침이 갈등과 투쟁이 아닌 평화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세계관 없이 살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조건은 인정하면서도, 세계관에 내포된 위험을 인지할 것을 요구하는 바르트의 경고는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왜냐하면, 세계관이 가진 매력과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신뢰하고 지켜야 할 것은 특정한 형태의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마르크스주의자’를 위해서도 죽으셨고 ‘자본주의자’·‘제국주의자’·‘파시스트’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은혜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필자의 제39회 기독교학문연구회 연차학술대회(2022.10.29. 백석대)의 ‘신학 분과’ 발제 논문인 “세계관 개념에 관한 신학적 비판: 칼 바르트의 신학을 중심으로”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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