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8년 만에 또다시 159명의 아까운 생명이 이태원에서 희생되었다. 모든 한국인이 안타까워하며 한국인 모두가 부끄러워해야 한다.
세월호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진실규명을 외치는 소리가 높다. 책임자 파악과 처벌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들의 희생이 가치 있거나 명예롭게 되지는 않는다. 세월호의 경우에는 8년이란 시간과 2000억 원이란 거금이 투입되었는데도 만족스러운 진실규명이 이뤄지지 않았고, 한국 사회의 질병이 되고 있는 정치적 이념갈등의 소재가 되어 ‘우리 모두의 탓’이 아닌 ‘너희들의 탓’으로 정죄하는 바람에 희생자들에게 미안함을 지닌 시민의 수가 반감되고 말았다. 그 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304명의 희생이 우리 사회에 아무 긍정적인 자취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진실규명의 요구가 과유불급이 되고 말았다. 이태원에서 희생된 고귀한 생명은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세월호와 이태원 희생자들을 제대로 추모하고 올바로 대우하는 길은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어떤 성질의 것이든 우리 사회에 이익을 남기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책임자를 가려내어 처벌하므로써 일벌백계의 효과가 일어날 수 있다. 앞으로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와 꼭 같은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도 해양사고는 줄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늘어났다 한다. 그보다는 더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서 고쳐야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의 근본 원인은 우리 한국인 모두가 가지고 있는 안전불감증이고 이것을 고치지 않는 한 크고 작은 참사는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은 세계에 유례가 없을 속도로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 불과 100년 전에는 자전거도 만들지 못했는데 지금은 전투기를 개발하고 인공위성을 띄우고 있다. 과학기술의 이런 발전은 우리가 행사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을 엄청나게 키웠다. 그런데 그 힘을 안전하게 잘 사용하면 매우 생산적이지만 잘못 사용하거나 실수하면 엄청나게 파괴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물리적 힘이 커지는 속도만큼 그것을 안전하게 사용하는 의식은 키우지 못했다. 기술발전에 의식이 따라잡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소달구지를 몰고 다니던 때의 의식 수준으로 버스나 비행기를 몰고 있는 것이다. 소달구지를 몰 때는 “설마, 수레가 도랑에 빠지겠어?”라고 하면서 졸아도 큰 문제가 없지만 버스나 비행기를 몰면서 “설마, 사고가 나겠어?”라며 졸아서는 안 된다.
수년 전 길이 없어 통통배를 타고 강을 따라 오르내려야 하는 한 필리핀 오지에서 활동하는 한국 선교사에게 그 배에 구명조끼가 있는지를 물어 본 적이 있다. 그는 근 수십 년간 수많은 한국 방문객들을 그 배로 실어 날랐지만 구명조끼를 언급하는 사람은 나와 한 미국인 선교사 둘 뿐이었다 했다. 그런데 구명조끼가 없다 하자 그 미국인은 얼굴이 하얘졌다고 했는데, 나는 겁을 먹기는커녕 다른 한국인들과 다름없이 “아. 그래요!” 하고 잊어버렸다. 선박사고 위험에 대한 무대책에 왜 미국인은 얼굴이 하얘지고 왜 나를 포함한 한국인은 심각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 왜 한국은 산업재해사망자 수가 OECD 중에서 가장 많고 그 1등이란 불명예를 지금도 계속해서 달고 있을까? 금 년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었는데도 왜 달라진 게 별로 없을까? 왜 기업인은 안전보다 이익을 중시하고 왜 근로자들은 안전 도구가 거추장스럽다고 귀찮아할까? 한국 정도의 경제, 기술, 문화, 교육수준을 누리고 있는 세계 어느 다른 나라에서도 왜 우리만큼 인재가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 모두 우리의 고질인 이 “설마! 사고가 나겠어?”라고 하는 부끄러운 안전불감증 때문이다. 앞으로 과학기술은 발전할 것이고 물리적 힘은 계속 커질 것이므로 이런 안전불감증이 고쳐지지 않은 한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 같은 것은 또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우리의 이 후진적이고 살인적인 안전불감증을 고치자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경찰, 소방관, 행정기관, 국회, 기업인, 근로자와 시민 모두가 안전에 더 민감하고 조심하며 안전시설에 대한 투자도 늘려야 산업재해도 줄어지고 사고도 줄어질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이번 참사 희생자들의 죽음이 많은 생명을 살리는데 공헌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고 따라서 헛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진상규명보다 그들의 죽음을 더 값지고 의미 있게 만들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가르치셨다. 나의 목숨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목숨도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살인이 가장 악한 범죄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이 창피한 안전불감증을 고치는 데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는 것이 마땅하다. 안전불감증은 앞으로도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무수한 사람들을 계속 죽음으로 이끌 것이다. 그러므로 그 고질을 고치지 않는 것은 무책임의 정도를 넘어서 일종의 부작위(不作爲, omission)에 의한 살인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월호와 이태원에서 희생된 사람들 하나하나도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는 것도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산 자들의 의무라고 인식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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