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참사에 대한 분석이나 위로에 관한 상세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에게 맡기려 한다. 대신, 이 글에서는 인간의 고통을 향해 오신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잠시 묵상해 보자.
복음은 구원을 말한다. 인간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다. 죄가 삶의 이야기라면, 이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 역시 우리 삶 한가운데서 시작된다. 우리의 구원자는 하나님이다. 하지만 그의 구원은 마치 슈퍼맨처럼, 하늘에서 날아와 문제투성이인 지상으로부터 우리를 낚아채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원은 문제가 발생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비유를 계속하자면, 빨간 망토에 푸른 쫄바지를 입고 먼 곳에서 날아오는 슈퍼맨이 아니라, 굵은 뿔테 안경을 걸치고 군중 속에 뒤엉킨 클라크 기자의 모습으로 구원의 드라마를 펼친다. 바로 성육신의 진리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같은 사람을 구원하는 이야기다. 사람이 아니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내가 구출되려면, 바로 내가 처한 상황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사람을 통해 온 것처럼, 생명/부활 또한 사람을 통해 와야 한다(고전 15:21).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동일한 사람이 되셨다. 처음 창조된 존재가 “사람”(히브리어, “아담”)이듯, 우리의 구원자 또한 “(마지막) 사람”이다(고전 15:45). 첫 “사람”을 통해 죄와 죽음이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처럼, 이 마지막 “사람”의 순종을 통해 많은 사람이 “은총의 통치” 안으로 들어가고, 이를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간다(롬 5:15-21). 그래서 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드라마는 불가불 내 삶의 이야기와 얽힐 수밖에 없다.
히브리서는 이 “인간” 예수를 강조한다. 그는 제사장과 같다. 하나님을 대리하지만, 또 우리와 같다. 우리를 구원할 분이시기에,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존재가 되셨고, 우리와 똑같은 시험을 받으셨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뼛속 깊이 공감한다. 바로 이 공감이 구원의 근본 조건이다. 심리적 공감을 넘어, 온몸으로 삶을 같이하는 실존적 공감이다. 요새 말로 하자면, 가장 근원적 의미에서의 “참여와 연대”다. 죽음의 고통 아래 놓인 “인간”과의 철저한 연대를 통해 그리스도는 비로소 인간의 구원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셨다. 몸소 시험을 겪은 존재이기에, 시험 받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히 2:17-18).
물론 그리스도의 연대는 평범한 인간의 공감과 다르다. 아담이 시작한 불순종의 악순환과 달리, 그리스도는 고통을 통해 순종의 몸짓을 만들어 냈다. 원래 순종하게 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고난을 받으며 몸소 순종을 “배워야” 했다(히 5:8). 바로 여기서 그는 우리와 다르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았지만, “죄가 없다”(히 4:15). 그는 우리 아담들이 실패를 딛고,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라는 참 아담의 모습을 회복하신 분이다. 순종을 통해 그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이 되셨고, 이를 통해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토대가 되셨다”(히 5:9).
히브리서는 그를 “선구자”(헬, “아르케고스” - 창시자, 개척자)라 부른다(히 2:10; 12:2). 곧 “먼저 달려가신 분”(forerunner, 헬, ‘프로드로모스’)이다(히 6:20). 물론 그의 고난은 연약한 우리를 위한 “대속”의 행동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고통은 나를 끌어들이는 선제적 행보이기도 하다. 그는 나와 같은 존재가 되어 내 삶 가운데 길을 내며 앞서가셨다. 그리고 나는 그가 열어두신 “새롭고 살아있는 길”을 밟으며(히 10:20), 내 “믿음”과 “구원”의 선구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며 부지런히 달려간다(히 2:10; 12:1-2).
우리는 죽음의 공포 아래 살아간다. 이 공포는 피할 수 없는 이생의 “마지노선”이다(히 9:27). 예수는 이 죽음의 위력을 휘두르는 마귀를 정복하고 이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죽임을 당하셨다(히 2:14). 그의 이 행보는 우리 길을 앞서가신 “선구자적” 행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이 선구자를 바라보며 구원의 길을 달려간다. 그리스도의 행보는 우리 삶을 위한 지도가 되고, 우리는 그의 모습을 재현하며 우리 길을 간다. 그 모습의 핵심은 죽음의 공포 아래 있는 이들을 향한 참여와 연대다. 이제 이것이 우리의 행보가 된다. 바울의 말로 하자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빌 3:10-11).
하나님의 창조한 세상에서 고통은 모순이다. 죽음은 그 모순의 극단적 형태다. 욥기에서처럼, 모든 설명이 실패하는 “답 없는” 아픔이다. 우리의 최선은 이 고통과 답 없음에 함께 하는 것, 곧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공감이 우리 구원의 출발점이었듯, 사회의 고통을 향한 참여와 연대의 몸짓은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제자도이자 그의 구원을 구체화하고 넓혀가는 선교의 발걸음이 될 것이다. 경쟁적 욕망이 극한으로 치달으며, 타인의 약함과 고통에 대한 공감이 점점 어려워지는 시절, 사람이 되어 우리의 고통 속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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