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이 말씀이 쉬운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그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생각만으로 쉽게 되는 일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기본적 귀인 오류’라는 심리학 이론이 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사고의 오류로서, 어떤 일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항상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각의 경향성이다. 또 자신이 관여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고 타인이 관여하는 일은 그 원인을 그 사람 내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성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일어난 일이 그 사람의 내적인 자질과 연관되어 있다고 실제보다 더 강하게 믿고자 한다. 나에게도 코로나19에 걸려 온 나의 가족 구성원이 좀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문제의 본질을 그의 부주의함이나 배려 없음에 있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가족이 함께 코로나로 고통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분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가 너무 어려운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에서 비롯된 오류에 뿌리가 있지만, 적어도 코로나에 걸려보니 코로나로 고통당했던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심정 그리고 그것에 공감한다고 생각했던 필자의 상상 속 공감이 얼마나 허튼 생각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 면도 있다.
말은 행동이다. 누군가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을 넘어서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가는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학교 폭력도 신체적 공격 이전에 언어적 폭력이 나타나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우리의 기도는 이미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행동이다. 일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향한 우리의 말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의 기도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하는 데는 ‘사회정체성 이론’이라는 이론도 있다. 여러 실험을 통해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실재함을 증명해 왔다. 사람들은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인 욕구로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데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지 못함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추방당함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두려운 경험이다. 이러한 소속감을 강하게 느끼지 못할 때, 즉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일을 당할 때 사람들은 자존감이 떨어진다고 느끼고 고통스러워하며 그런 상황을 모면하고자 편 가르기를 시도한다. 항상 조직 내에 사람들을 이간질하거나 남의 이야기를 하려는 사람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내집단과 외집단의 편을 가르면서 떨어진 자존감을 만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함께 비밀을 나누는 동안에는 자신이 같은 편 또는 더 강한 편에 속해 있다는 찰나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떨어진 조직일수록, 생존의 위협을 느낄수록 우리는 서로 분열하고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신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정체성을 잊어버릴수록 타인을 포용하려 하지 않고 공격하려 한다는 것이다. 왕따를 당했던 아이들이 어느새 왕따를 가하는 아이들이 되어있음을 우리는 현장에서 보고 있다.
우리와 그들은 다르며 그들의 고통과 불행은 그들 안에 이유가 있다는 그런 판단과 정죄의 말을 스스럼없이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 대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맞은 자를 불쌍히 여김은 그의 체휼함에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앞서 피해 갔던 대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맞은 자의 이웃이 될 수 없었는데 그들은 아마 강도 맞은 자를 자신들과는 너무도 다른 존재로, 그리고 고통을 당해야 할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서둘러 멀찍이 피해 자기 갈 길들을 갔을 것이다. 그들이 매일 드리는 예배도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도 강도 맞은 자의 이웃이 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맞은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겼고 용기를 내었으며, 실제로 자기가 지금 가진 것으로 이전에도 여러 번 해 본 듯 능숙한 솜씨로 꼭 필요한 도움을 지체치 않고 제공하였고, 힘을 모아 줄 나귀와 동역자도 있었다. 고통당하는 자를 버려두고 자기 ‘의’에 취해 분노하며 강도를 잡으라고 소리치며 달려가지도 않았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시며 어떻게 우리가 이웃이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 10.29 참사의 당사자들과 가족들 앞에서 되새겨 본다. 우리의 연약함은 지극히 작은 소자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며 지극히 작은 소자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더욱 무겁게 받게 한다.
교회는 주님의 마음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대해야 하며 우리가 하는 말부터 주님 보여주신 본보기를 따라야 할 것이다. 위로와 사랑과 권면과 회복의 언어를 나누어야 할 것이며, 상한 자를 감싸는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억하며 트라우마를 경험하는 많은 사람을 실질적으로 전문적으로 돕는데 용기를 내고 재정을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는 나와 그들을 구분하며 판단과 정죄의 말을 쏟아내는 자리에 앉아 여리고로 급히 내려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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