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하며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처음엔 현실감마저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났던 것은 요즘 만나고 있는 청년 내담자들이 “혹시나 그곳에 있지 않았을까?”라는 속절없는 불안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내가 상담하는 청년 내담자 모두 안전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지만, 걱정 가운데 며칠을 지나는 동안 나는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몇 번의 상담 문의를 받았다. 하지만, 문의만 있었고 상담이 성사되지는 않은 것에 나는 내심 안도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위로를 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직후 정부는 용산구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이태원 광장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고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였다. 이런 조치들은 이태원 참사를 한국 사회 전체가 함께 슬퍼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공동체적인 사회적 애도의 시작으로 마땅한 조치였다. 하지만, 참사의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한 진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다시 한번 극심한 진영 논리에 휘말리며 둘로 나뉘었다.
보수 진영은 참사 희생자들의 부주의를 정죄하고, 진보 진영은 정부의 일련의 조치에 대한 다양한 의혹들을 제기하며 비난의 수위를 높여갔다. 애도 기간을 설치한 것이 유가족의 고통을 전면에 배치하고 국가와 사회가 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급작스러운 재앙으로 슬프고 황망한 가운데 모두의 눈과 귀를 가리게 하려는 위장된 ‘애도 정치’라는 비판이 제기될 만했다.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의 비극 앞에서 한국 사회는 둘로 나뉘어 지금까지도 다투고 있다.
그래도, 한국 교회 공동체만은 참사로 상처 입은 이들, 자녀를 상실한 아픔을 한마음으로 위로해야 한다. 물론, 걱정하는 마음으로 욥에게 달려갔던 세 친구의 위로도 여호와께서는 우매했다고 하였으니(욥 42:8), 이태원 참사의 아픔에 처한 이웃에게 주는 우리의 어떤 말도 하나님 앞에 우매한 말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어디에선가 시작해야 한다.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완전함에서 비롯되는 고통을 어떻게 체휼하시는 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고통을 헤아려 민망히 여기신다(마 9:36). 하나님은 이태원 참사의 아픈 순간들에 희생자들과 함께 고통받으시고 슬픔을 함께하시며 치유의 손길을 주시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라고 명하신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들을 대상으로 자녀를 상실한 부모의 애도 과정을 연구한 논문에 따르면, 참사 희생자 유족들은 우울, 무기력, 분노와 같은 심리적 고통뿐 아니라 불면증이나 통증 등의 신체적 문제를 겪는다고 한다. 자녀를 잃은 부모들은 자녀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부모로서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자책할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다는 한스러움과 참사의 원인을 제대로 밝힐 수 없음에 대한 무력감으로 일상 혹은 이전 생계 활동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감정에 빠져든다. 그들은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주위 지인과 친인척들의 도움마저 때론 위로가 되지 못해 그들과도 분리되며, 자녀를 떠오르게 하는 것들과 차단을 시도하면서 점차 사회로부터도 단절되는 고통을 겪는다. 또 부모들은 희생된 자녀에게 정신을 쏟고 이해할 수 없는 자녀 죽음의 이유에 집착하느라 남은 자녀에게 신경 쓰지 못해 방임하게 되고, 부부간 소통이 단절되거나 심한 갈등 가운데 위기를 맞기도 한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분란을 조장하는 언론 보도로 자녀 죽음에 대해 지지와 도움을 받지 못하고 국가와 정부의 보여주기식의 태도에 대한 실망과 불신, 분노로 극도의 배신감이 유족들을 끝이 없는 고통 속으로 몰아간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가 지난 12월 10일 출범하면서 창립선언 기자회견을 가졌다. 참사가 일어난 지 무려 43일이 지나서야 가족들이 겨우 함께 모일 수 있었던 상황은 유가족들이 책임 있는 당국자들의 진심을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위로와 치유의 손길이 계속 늦어진다면, 그들은 심지어 교회 공동체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까 염려된다. 우리 기독 공동체는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 치유의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참사 유족의 아픔을 겸손하게 듣고 체휼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유가족들이 그들의 아픔을 눈치 보지 않고 드러내어 마음껏 이야기하며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진영 논리보다 먼저 우리 마음에 그들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먼저 마련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희생자들과 함께 울며 “함께 하겠습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로 아픔 가운데 처한 희생자 친지들과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또한, 우리 각자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하며 애도를 하는 것이 올바른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이태원 참사의 상처를 모두 치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주님 오실 날까지 이와 같은 아픔은 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 40:1)라는 것이 ‘지금 여기’를 사는 기독 공동체를 향한 여호와의 명령이니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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