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세상에는 억울한 일들이 있다. 법은 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법은 이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무기력하거나, 억울함을 더 사무치게 만들기도 한다. 법이 함께 눈물을 흘리면, 법이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씻고 법이 위로가 된다. 그러나 법이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법은 억울한 사람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고 법으로 괴로움을 더해준다. 아직 법적 절차와 논쟁이 진행 중이라 비관적인 결론을 속단할 수도 막연히 낙관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도 없지만, 이번 이태원 참사에서 법이 피해자와 눈물을 함께 흘릴지, 법이 피해자의 괴로움이 될지, 법과 재판의 기능과 한계에 관해서 검토해본다. 시작점의 명제는 법의 순기능, “법에는 피해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고 법이 위로를 줄 수 있는 제도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다.
첫째는 대한민국 헌법이다. 헌법 10조가 규정한 ‘국민의 기본권보호의무’는 34조 6항에서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는 ‘국가의 안전보호의무’로 구체화되어 있다. ‘국가의 (적극적) 기본권보호의무’는, 근대 민주주의 헌법이 집중했던 ‘국가의 (소극적) 기본권침해금지 의무’와 더불어 20세기 현대국가 헌법이 인식하고 발전시켜온 국가의 핵심적인 헌법적 의무다. 이 사건에서는 대한민국 국가가 국민에 대한 헌법적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에 대해서 이견의 여지가 거의 없다. 미흡하다고 비판받는 경찰 수사를 통해서라도 공무원들 일부가 업무상과실치사죄 기소의견으로 송치된 사실은,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의 안전보호의무에 관한 국가의 헌법적 의무위반을 인정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관련 고위 공직자들의 헌법적 책임에 대한 헌법재판을 통한 책임추궁 여부는 아직 미결 상태이다.
둘째는 형법 절차이다. 아직 형사 절차는 시작 단계에 있으나, 최소한의 형사책임은 인정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논쟁의 대상은 (i) 죄목이 ‘고의범-살인죄’인가 ‘과실범-과실치사죄’인가의 점과 (ii) 형사책임 범위가 상급 공무원으로 확대될 것인가의 점이다. 지금 정부는 과실치사죄에 하위 책임 공무원들 기소로 형사책임 범위를 제한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으로 비판받고 있지만, 형사 기소와 처벌의 범위에는 특검제도의 가능성이 남아있어서, 형사 절차를 통한 위로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미리 낙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세월호 사건의 조사와 미흡한 만족도에서 보듯이, 현실적으로 세상의 형사사법 절차에는 증거를 통한 입증의 어려움 등으로 말미암아 ‘만족할만한 수준의 신원(伸冤)’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안타깝지만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셋째는, 국가의 불법행위 손해배상책임을 추궁하는 민사절차이다. 국가배상책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이미 정부가 인정한 셈이어서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손해배상제도는 징벌적 손해를 인정하지 않고 있어서, 우리 민사절차에서 희생자에 대한 국가배상의 금액은 법이 주는 위로로서는 큰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 같다.
반대 명제는 법의 역기능, 즉 “법이 피해자와 함께 눈물 흘리지 않고, 피해자들에게 괴로움을 줄 가능성도 있다”라는 것이다.
이미 이태원 참사와 관련하여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법과 재판은 피해자의 위로에 대해서 공평무사한 중립적 심판관의 역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이태원 참사처럼 법의 집행기관인 국가 자체가 가해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경우 정부와 사법기관은 스스로 사건의 상대방 당사자가 되어, 성경의 다윗왕처럼 책임을 축소하고 무마하는 데 법과 힘을 사용할 유혹을 느끼고 또한 그렇게 행사하게 된다. 이때는 법이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다투고 피해자에 대해서 주먹질을 하는 가해자가 된다. 인류 역사에서 이 일은 수없이 반복되어 왔다. 사람이 하는 법과 재판제도의 근원적인 한계에 더해서 국가가 국민의 상대방 당사자가 되는 권력적 불평등은 법을 왜곡시키고 법을 가증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필자는 소송변호사로서 한편으로는, 법의 순기능에 의지하여 많은 재판을 하고 법이 주는 위로를 의뢰인과 함께 경험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재판에서 법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에 대해서 성실하지 못하거나 냉혹한 판단으로 가하는 ‘법의 괴로움’으로 고통받은 일도 많다.
왜, 법과 재판이 순전하지 못하고,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지만 피해자의 괴로움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 이것은 법을 잡고 재판을 하는 권력자와 세상의 심판관들 또한 죄인이라는 기독교의 진리로 인한 것이다. 그러면 이 세상의 법과 재판을 포기할 것인가? 우리가 법과 재판으로 세상의 눈물을 다 씻고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우리가 법과 재판을 둘러싼 노력을 포기하면 세상은 곧바로 모든 사람이 눈물과 원통함에 빠지는 이생 지옥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태원 참사의 법적 신원과 관련해서도, 어렵고 답답해도, 인내를 가지고 열의를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현명하게, 법이 피해자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법이 위로를 주고, 법이 괴로움이 되지 않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