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4.16 참사’, ‘10.29 참사’와 같은 사건을 두고, 신앙이 곧바로 정제된 언어를 내기는 어렵다. 성경은 모두의 모두를 위한 ‘영적 교훈’을 담아내지만, 현실에서 벌어진 개별 사건에 ‘진단-대책’ 프로세스를 제공하진 않는다. 그럼에도 2014년에 단원고 학생들이 진도에 간 사연을 우리는 대략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2022년에 희생된 청년들이 이태원에 간 이유 역시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이 거기에 이른 사연이 각기 변별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단-대책’에 관한 ‘영적’ 처방을 내리곤 한다. 이를테면 “왜 갔을까?”에 대한 답을 단순화한 후 공론장에 던져진 사회적 죽음을 개인의 책임으로 제한하는 언어가 난무하고 있다. ‘10.29 참사’ 희생자들이 이태원에 간 행위는 사적 선택의 영역에 놓이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사회구성원의 자리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는 공적 책임의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면 신앙의 언어는 공적 책임을 나눠진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숙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믿음의 눈’으로 볼 것을 강조하면서 혹자는 핼러윈 축제가 악령을 좇는 우상숭배라고 단정하는 듯하다. 다른 누군가는 이태원이라는 장소가 본디 향락적이고 문란한 서양문화의 진원지라고 생각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태원은 미8군 사령부와 인접해 발달한 까닭에 독자적인 혼종성의 문화를 일궈왔다. 그런데 그러한 장소 정체성 자체에 문제의 본질이 있는 것처럼 호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이태원을 동성애와 마약이 판치는 곳으로 규정하려는 태도는 ‘호도’의 더 극단적인 양상일 수 있다. 실제로 ‘10.29’ 참사를 둘러싼 그리스도인의 공론장 일각에는 호모포비아(homophobia), 이슬라모포비아(islamophobia)가 어른거리고 있다. 공적으로 주최하지 않은 행사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놀다가 죽었는데 ‘사회적 책임’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이라는 시선도 힘을 얻고 있다. 그래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대책 수립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이 일각에서는 편향된 정치 집단으로 매도되고 있다. 그들을 향한 인터넷 댓글에 레드포비아(redphobia)가 출현하는 익숙하지만, 여전히 슬픈 장면도 목격된다.
‘10.29 참사’ 뉴스에서 처음 ‘압사’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과잉 경쟁 구조에 시달려온 청년들의 현실을 떠올렸다. 계층화·양극화를 조장하는 구조적 시스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는데, 수많은 청년들은 그저 ‘도태’될까 연연하며 살아간다. <오징어 게임> 속 잔인한 게임에 죽은 이들이 규칙과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한병철은 <피로사회>를 통해, 성과를 향한 열정 속에 “박탈(privativ)하기보다는 포화(saturativ)시키며, 배제(exklusiv)하는 것이 아니라 고갈(exhaustiv)시키는” 폭력이 스며 있다고 말한다. 비단 한국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겠지만(그래서 <오징어 게임>이 엄청난 흥행을 한 게 아니겠는가), 한국의 청년들은 자기 자신을 착취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타인을 착취하는 경쟁 무대에 과도하게 사로잡혀 있다. 더욱 애처로운 것은,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도 오늘날 청년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세대 간 경쟁에서도 이미 밀려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압사’라는 단어는 차가운 의과학적 용어이기 이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청하는 뜨거운 사회학적 용어인지도 모른다.
‘10.29 참사’ 이후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자숙하고 회개하며, 책임의 몫을 찾고 있다. 다른 누군가는 모여서 기도회를 갖기도 하고, 모금 활동 등을 통해 실천적인 지원을 하는 이들도 있다. 감사한 일이다.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인 중 일부는 참사 예방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궁리하고 있다. 그런데 참사가 벌어지면 희생자의 선택과 행위에서 ‘희생’의 명분을 발굴한 후, 단순명료한 ‘영적 교훈’을 설파하는 이들이 난립한다. 그들 모두를 탓하고 싶진 않다. 그러나 누군가의 비극을 개인 신앙 성숙의 계기로 치환하는 데 그친다면, 교회는 현대판 바리새인을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2천여 년 전, 예루살렘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희생자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이유를 공유했던 것 같다. 그와 같은 합리적(?) 묘비명은 대개 너무 명쾌해서 이기적이다. 유념할 건, 예수님이 회개를 촉구하며 “망하리라”(눅 13:5)고 말한 대목이다.
‘10.29 참사’를 생각하면, 예방을 위한 대비에 실패했고, 구조를 위한 현장 대응에도 실패했으며, 공권력의 수습을 위한 체계적 노력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남은 건 시스템 보완을 위한 대책 마련이다. 이마저 실패한다면, 우린 희생자들에게 진 빚을 갚을 길이 없다. 이 순간 그리스도인은 극단적인 분리주의자, 혹은 배타주의에 사로잡힌 바리새인이 되어선 안 된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의 가족과 그들의 이웃 앞에서 흘린 눈물(요 11:35)을 생각할 때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기 위한 노력이 곧 경건의 신앙(약 1:27)이라는 말씀을 묵상해야 할 때다.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사회안전망을 마련하기까지 이태원에서 멈춰선 159명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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