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그날의 기억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10월 30일, 새벽 2시가 조금 안 된 시점이었다. 할 일을 마치고 잠을 청하기 전 연락을 확인하던 중, 전날 밤에 있었던 사고로 수십 명의 사람이 심정지 상태에 빠졌다는 비보를 접했다. 어안이 벙벙한 채 재빨리 인터넷을 켜 사고의 경과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피해가 최소화되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바램과는 달리 사상자의 숫자는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태원 참사’에 대한 짤막한 회고이다.
이번 ‘이태원 참사’는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첫째는 참화(慘禍)를 당한 대상이 청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고로 인한 사망자 159명 중 20대는 106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30대 사망자 수까지 고려하면 약 85%에 육박한다. 이들은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고 있던 꽃다운 청춘이었으며, 누군가의 자녀이자 친구였다. 특별히 참사의 자리에 소중한 제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하니 개인적으로 더 가슴이 아린다.
또한 ‘이태원 참사’가 정쟁의 도구로 비화한 점도 문제였다. 사고 직후의 초동 대응은 비교적 잘 이루어졌지만 사고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정부 관계자의 실언과 사고 당시 책임자들의 무책임한 행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된 후 야당은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했다. 더하여 참사자의 명단 공개에 관해서도 여야가 첨예한 대립을 이어 나갔다. 사고를 수습하는 데에 신경을 써도 부족할 판에 펼쳐진 정쟁은 다수 국민을 피곤하게 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깊은 침체로 들어간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로 인해 이태원 거리가 활기를 잃고 텅 비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모두가 그 장소를 다시 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주민들과 상인들은 지금도 희생자들의 비명이 들리는 것만 같다고 한다. 코로나19의 장기화, 저출산과 고령화, 취업난과 높은 부동산 가격으로 살아가기조차 버거워하는 사람들에게 ‘이태원 참사’는 치명타였던 것 같다. 그때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모두가 슬픔의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주변에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듣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는 함께 우는 것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는 바울 사도의 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구절일 것이다. 때로는 상투적이라고도 생각될 수 있는 이 말은 그러나 이 시점에서 가장 긴요하다. 우리 주변에서 사고로 인해 고통을 겪는 이들을 전부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두 손 붙들고 들어줄 수는 있을 것이다. 특별한 말을 꺼내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면 깊은 곳에 숨겨둔 아픔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겪는 분들에게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절망 중에서 희망을 외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 중 하나가 현실보다 크신 하나님을 기대할 수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 나타나 반드시 그를 도우신다(시 42:5). 소망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일하신다면 절망은 희망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그분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사 43:19). 우리마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다면 도대체 누가 이 세상 가운데 희망의 목소리를 전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주께서 ‘이태원 참사’로 인해 마른 뼈와 같이 변해버린 이 나라에 생기를 더하시고 큰 군대로 바꾸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다(겔 37:10). 이 소망의 외침이 많은 사람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전해야 할 소망은 무엇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다. 주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허락하신다(요 14:27). 험난한 세상 속에서 성도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까닭은 예수님이 임마누엘의 하나님, 곧 우리 곁에 항상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태원 참사’의 기억으로 지금도 힘겨운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평안을 전하며 그분이 유일한 ‘샬롬’이 되심을 알려야 한다. 아파하는 자들 가운데 주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 곧 참된 위로이기 때문이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님의 시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압니다. 당신의 빛은 밤에도 빛날 것을요.” 우리는 안다. 예수님만이 ‘이태원 참사’를 이겨낼 유일한 답이 되신다는 것을. 복합적인 절망이 교차하는 현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금 예수님의 이름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이름에 희망이 있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순간에도 당신의 이름을 의지하며 당신께 소망을 두는 자들을 통해 참된 위로를 선포하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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