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현재 한국의 사회와 교회는 지난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있었던 참사로 인하여 다수가 애통해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동일한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성경적으로 어떤 정리와 대책이 필요한지, 그리고 우리는 유가족과 아파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참된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지를 오랫동안 청년 세대를 섬겨오신 전문가이자 지역교회 목회자이신 이상갑 목사님의 시각을 통해 정리하고 이해하며, 그 혜안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 일시 : 2023년 1월 6일(금) 오전 11시
- 장소 : 산본교회 목양실
- 인터뷰어 : 이현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과정, 청파감리교회 청년)
- 사진 & 정리 : 석종준 (서울대 캠퍼스 선교사)
이현규 : 목사님께서는 한국 교계에서 청년들을 오랫동안 전심으로 섬겨온 대표적 목회자이십니다. 그동안 어떤 구체적 섬김의 내용이 있으셨는지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이상갑 : 저는 한 교회에서 10년 동안 청년대학부를 줄곧 담당하면서 양육, 훈련, 파송하는 일을 했습니다. 동시에 학복협(학원복음화협의회) 교회실행위원장과 협동총무로 청년 사역자들을 훈련하고 세우는 일을 했었지요. 10년 전부터는 청년들과 사역자들의 고민을 상담하고 멘토링 해주는 ‘청년사역연구소’를 세워서 섬겨왔습니다. 그 결과로 <설래임>, <바이블 정신>, <결국 말씀이다>라는 책들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현재는 산본교회 담임 목회자로서 75년 된 전통교회를 더욱 아름답고 건강하게 개혁하고 갱신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현규 : 청년들에 대한 사랑이 평소 남다른 목회자로서 159명이라는 너무 많은 젊은이가 희생된 10.29 참사 소식을 접하고 충격이 크셨을 것 같습니다. 언제 어떤 마음으로 소식을 접하셨는지요.
이상갑 : 10월 30일 주일 1부 예배 때 한 집사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았고요. 예배를 마치자마자 검색했지요. 충격 속에서 2부, 3부, 4부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또 일어났나”라는 생각에 참담하고 답답하고 또 알 수 없는 분노가 마음속에 일어나기도 했지요.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 지금 정부의 방향과 가치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에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는 이미 세월호를 경험했었잖아요. 그 아픔을 경험했으면 한 단계 더 성숙해져야 하는데, “대응 태도와 자세가 전혀 바뀌지 않았네!”라는 생각도 했고요. 159명이 그렇게 희생된 것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지요. 사회안전망이 무너진 것이고 우리 불특정 다수의 국민이 희생된 거나 마찬가집니다. 왜냐하면 이태원이라는 곳은 누구든 갈 수 있는 데고, 그 현장에 있었으면 누구나 당사자가 될 수 있었거든요.
이현규 : 이번 참사는 핼러윈(Halloween)이라는 축제 문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 기원이 켈트족에서 온 것으로써 죽은 이들의 혼을 달래고 악령들이 해를 끼칠까 두려워 자신을 같은 악령으로 착각하도록 꾸미는 풍습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에 어떻게 접근하고 이것을 이해해야 할까요?
이상갑 : 핼러윈이 죽은 이의 혼을 달래고 악령을 쫓는 의미가 있기에 저도 마땅히 경계는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축제 문화적 측면에서는 너무 경직된 접근보다 청년 문화의 요소를 잘 살려가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 요소는 분명 경계하되, 청년들에게 이토록 축제와 기쁨이 필요한 시대에 교회가 오히려 선도적으로 기독교적 가치와 의미를 잘 담아내는 문화 행사로 재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항상 극단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한데요.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지켜보니까 이것을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대신, 교회가 그냥 축제 문화적 요소를 살려서 그 자체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장으로 삼는 것을 보았거든요. 따라서 저는 우리가 문화를 세상의 것과 기독교의 것으로 분리하는 이원화 현상에 대해서도 조금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그렇게 하면 사실 진짜 성숙이 어렵거든요. 어떤 의미에서 진짜 성스러운 것은 세상에서도 건강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세상 문화에 대해서 배척하면서 너무 극단적으로 간다면 저는 한국 교회가 바리새인화 될 위험성이 상당히 많다고 봅니다.
이현규 : 목사님, 세상 문화와 그리스도인들의 바람직한 관계는 어떠한 것일까요?
이상갑 : 우리가 물고기라면 문화는 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에게 문화에 대한 세 유형의 입장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혼합 유형인데요. 세상 문화와 기독교를 그냥 혼합하는 것이죠. 이렇게 되면 결국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우리는 세상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는 선 긋기가 필요합니다. 세상과 같아지면 결코 변혁시키거나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기가 어렵습니다. 둘째, 단절 유형인데요. 세상 문화에 담을 쌓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서울에서 사역할 때 어느 아파트 단지에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견고한 담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부자들이 사는 고급 아파트였고, 다른 한쪽은 가난한 분들의 임대주택이었어요. 가슴이 아파서 신방을 간 분께 “권사님이라도 계속해서 저 담 없애자고 건의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담은 임대주택 아이들을 아예 못 오게 했는데, 이는 아파트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말 품격 없고, 가난한 자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는 생각해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담을 제거하는 역할이 해야지요. 담을 쌓는 것은 구별이 아닌 분리고 단절입니다. 고립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성경적 가치로 세상이 이기적 목적으로 만든 온갖 담을 허무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변혁 유형입니다. 대기업에 들어간 한 청년이 어느 날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회사에서 폭탄주 마시는 자리를 자주 가게 되는데 그만두고 싶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만두면 너는 세상과 문화적 단절을 선택하는 거야. 물론 그 사람들하고 같이 똑같이 폭탄주를 마시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혼합이기 때문이지. 다만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그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고 파고들어서 변화시켜 봐라. 그러면 때로 손해를 보고 여러 어려움에 직면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길을 갈 가치는 있다.” 저는 회식 자리에 사비로 ‘컨디션’을 사서 돌리라는 조언도 했고, 그래서 결국 남았는데요. 1년 정도가 지나니까 회사에서 정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믿고 맡길 사람을 찾을 때 점점 이 청년을 찾기 시작했어요. 이제는 누구보다 더 신뢰받고 사랑받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이현규 : 교계에는 이번 참사에 여러 시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희생된 젊은 영혼들에 대해 우선 추모해야 한다는 입장, 또 한편으로는 귀신을 부르는 이방 축제에 가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입니다. 목사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상갑 : 이분법적 사고인데요. 우리 기독교가 균형 감각을 잃은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이지요. 무엇이 우선일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그 많은 생명이 죽었다면 신앙을 떠나서 나라를 떠나서 빈부귀천을 떠나서 애도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그것이 성경적으로 인간적인 거예요. 그 죽음이 핼러윈 축제 때 일어났다고 해서 비판을 먼저 한다면 이미 인간적이기를 포기한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기독교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길”(롬 12:15)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을 심각하게 해 보게 됩니다. 사고를 당한 159명 중에 내 형제, 자매. 자녀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게 함부로 돌을 던지고 비난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에서는 ‘나’와 관계없는 사람들의 죽음이라고 함부로 대하는 것은 우리가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구절처럼 그리스도인이라면 사고로 슬퍼하고 애통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우선 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현규 : 언론에 따르면, 이번 참사 유가족의 상처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보듬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정부가 ‘참사’ 대신 ‘사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로 표현하라 하고, 조의문구 없는 ‘근조 리본’을 달도록 하며, 책임과 정보 공개를 회피하고, 피해자들 간의 만남을 제한시키려는 정황 때문에 참사를 대하는 진정성에 대해 의심을 샀지요. 물론 책임을 국가와 공무원들에게만 돌리는 것도 맞지는 않겠지요. 목사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이상갑 : 진정성은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있지요. 반대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은 상처를 계속 찌르고 더 아프게 하지요. 저는 이번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대하는 책임자들의 모습에서 진정한 권력의 실종을 본 것 같아요. 말씀대로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지요. 또 사건의 해석도 독점하려 하고 유가족의 아픔을 공감하고 소통하려 하기보다 규정된 틀 속에 가두려 했지요. 그 때문에 국민은 이 사건을 바르게 해석하고 판단할 기회와 잘못을 수정하고 고칠 기회를 놓치고, 그 모든 것이 그냥 삭제돼 버리고 배제돼 버렸단 말이죠. 이렇게 되면 비슷한 사건이 얼마든지 또 재현될 수 있습니다. 이 아픈 사건을 통해서도 새로운 대안 시스템을 다시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국가와 권력이 무엇인가를 질문해 봅니다. 국가 권력은 기본적으로 국민에 의해서 부여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애민의 마음이 우선 있어야 하지요. 유가족에 대해서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마음이 우선 있어야 하는데, 계속 통제, 통제로 이어졌죠. 정말 비통하고 애통한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규명하고 건강한 시스템적 보완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교회와 시민사회라도 제대로 함께 고민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고 또 유가족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현규 : 목사님께서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큰 재난을 당한 우리 주변의 ‘우는 자들’에게 참된 위로를 위해 다가가는 데 필요한 바른 성경적 선재 조건은 어떤 것들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저는 성경에 나오는 ‘불쌍히 여김’(시 103:13)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어요. 우리 사회가 반복해서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결국은 나만 생각하고, 어떻게 보면 소수 특권자 중심의 사고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데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끊임없이 하셨던 일은 불쌍히 여기신 거예요. 예수님은 기진맥진해서 돌아갈 힘도 없는 굶주린 회중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밥 한 끼를 먹고 가게 하신 일, 귀신 들린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귀신을 쫓아내신 일, 또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정말 불쌍히 여기셔서 치유하신 일을 하셨거든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가는 ‘팔복’의 영성과도 관련되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서 손해 보고 핍박받는 자,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해야 할 복의 본질적 모습이거든요.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쌍히 여김’이라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이 될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이현규 :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참사와 같은 재난의 한복판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참된 위로자’로 쓰임을 받으려면 어떤 구체적인 실천과 삶의 내용이 가능할지요?
이상갑 :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은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라고 했지요. 예수님의 치유가 완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치유하시려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으셨어요. 제자들의 배반, 사람들의 비난과 멸시와 조롱 등 정말 다양한 고난을 경험하셨지요. 그런데 저는 오늘날 기독교가 예수님의 모델을 전혀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고민을 참 많이 합니다. 반대로 교회가 예수님의 본을 따라간다면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희망이 되고 변혁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최근 읽은 소설 가운데 하나가 <불편한 편의점>인데요. 서울역의 노숙자 독고라는 주인공이 염여사라는 편의점 주인의 잃어버린 지갑을 주워 주면서 관계가 맺어지고, 처음에는 이 노숙자에게 도시락을 편의점에 초대해서 도시락을 주고, 나중에는 겨울에 쉴 수 있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도록 이 편의점 ‘알바’로 고용합니다. 그래서 이 노숙자는 치유되고 그를 만난 사람들도 치유되는 참 따뜻한 이야기인데요. 저는 우리 교회가 이 편의점 주인의 마음으로 상처 입고 고통당하는 자, 우는 자, 소외된 자들을 대한다면 세상은 더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 더 말씀드리면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어느 고아원 봉사를 계속 나갔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변화가 별로 일어나지 않았어요. 마음의 문도 잘 열지 않아서 고민하다 어느 날 원장님의 허락을 받고 아이들과 매주 하루씩 자면서 같이 보냈습니다. 그래서 함께 이야기하고 또 밤늦게 공부를 가르기도 했는데요. 결정적 변화가 언제 일어났냐 하면 그 아이들 중 한 명이 자기 상처와 아픔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너무나 큰 고통과 아픔을 경험한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위로도 하지 못했어요. 단지 그냥 같이 계속 울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어요. 아이에게 치유가 일어나고 그때부터 친밀함을 경험하면서 제가 하는 말과 위로, 제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아이들의 마음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그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은 교회가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 오셔서 행하셨듯이 광야로, 눈물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좋겠다는 것이었지요. 우리가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적어도 그곳은 변화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현규 : 이번 참사와 관련해서,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도 “기성세대가 이 땅의 젊은 세대의 생명과 미래를 최선을 다해 돌보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이 포함된 <10.29 참사 공동기도문>을 작년 11월 17일에 발표한 바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청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이상갑 : 청년 때는 누구나 두려움과 불안이 있고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숲을 지나고 있는 느낌이 있지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동굴이 아니라 터널을 지나고 있다!” 터널은 반드시 때가 되면 출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머물러 있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어떤 사건이든 우리는 성경적 관점에서 고민하고 해석하고, 혹시 좌로든 우로든 치우쳐 있다면 균형을 다시 잡고 계속해서 걸어 나가면 반드시 길이 생기고 출구로 나아가는 역사가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산에 가보면 등산로가 나 있죠. 처음부터 난 것이 아니에요. 누군가가 그 길을 먼저 걸어가기 시작한 거예요. 그 길을 또 다른 사람들이 걸어감으로써 등산로가 된 거죠. 하나님의 사람은 시대나 상황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바라보아야 할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그 뜻을 붙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거예요. 아무도 다니지 않는 길이라면 어떻습니까? 그 길이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따라서 저는 청년들이 말씀을 따라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실험하고 시도하고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기에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절대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나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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