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미국의 화가이자 조각가 에릭 피슬(Eric Fischl)은 9.11 테러가 발생한 후에 <열 개의 숨>(Ten Breathes) 연작을 발표하였다. 피슬은 빌딩에서 추락하는 여인의 모습을 통하여 희생자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녀가 추락하면서 내뻗은 손은 마지막 순간까지 도움을 받고자 했다는 여인의 절박함이 담아 마음을 안타깝게 한다. <열 개의 숨> 연작에서 백미는 <사마리아인 연구>라는 브론즈 인물상이다.
(그림1 에릭 피슬, 사마리아인연구,브론즈,2005)
이 작품은 9.11의 희생자를 돌보는 장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단 한 명이라도 구하고자 애쓰는 의인을 작품에 담았다. 고통과 죽음의 감정이 엄습하는 작품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축 늘어진 채 사경을 헤매고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긴장, 인간애, 공감으로 가득 차 있지만 표현주의적 과잉은 발견되지 않는다. 작가는 엄숙한 구조 장면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하였다. 에릭 피슬은 이처럼 <열 개의 숨> 연작을 통해 무고한 희생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그들에 대한 지지를 잊지 않았다. 재난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제작할 때 그가 초점을 맞춘 것은 전적으로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이었다.
2022년 이태원의 비극적 참사가 일어난 뒤 시민들의 반응은 피해자의 아픔과 슬픔에 동참하는 쪽과 오히려 희생자들을 비난하거나 조롱하는 쪽으로 갈렸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정치적 진영 논리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왜 우리는 참사 앞에서도 판이한 입장을 보이며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거나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걸까? 피지도 못한 청춘들이 죽었는데 그들의 죽음을 이용하려 드는 것은 옳은 일일까?
세월호 참사의 스쿨닥터 김은지 정신과 의사는 카오스에 빠졌던 학생들을 회복시킨 요인이 무엇인지 물었더니 학생들은 가족, 친구,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고 도와준 분들을 꼽았다고 한다. 그들에게 베풀어준 온정이 가족과 친구 못지않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치유자로 거듭났다. 그들 중 일부는 학대, 학교폭력, 사고 등 트라우마를 겪는 지역 아동을 돕기 위해 조직,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에서 취약한 지역 아동을 돕는다고 한다. 이처럼 돌봄은 또다른 돌봄을 만들어 씨앗처럼 새로운 곳에서 다시 자라게 한다.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지지’는 그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재기할 수 있도록 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셈이다.상처입은 사람은 타인의 재난과 죽음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후 ‘운디드 힐러’가 된 미술가가 있다. 캔디 창(Candy Chang)은 <내가 죽기 전에>(Before I Die)라는 주민 참여형 프로젝트를 펼쳐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림 2 캔디 창, 주민참여 프로젝트,뉴얼리언스,2011.)
이 프로젝트는 세계 75개국에서 5천여개의 프로젝트로 펼쳐지는 큰 성과를 냈다. 작가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뉴올리언스 마을의 버려진 건물 벽을 칠판으로 만들어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주민들이 “죽기 전에.....하고 싶다”라는 글을 완성하도록 한 것이다. 반응이 의외로 뜨거웠다. “누군가의 기사가 되고 싶다.” “세계를 여행하고 싶다.” “나무를 심고 싶다.” “그녀를 다시 한번 안아보고 싶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등등 그들의 희망 사항을 써넣었다. 사람들은 이웃 간의 공감을 키우고 죽음과 슬픔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작품은 이라크와 브라질, 카자흐스탄과 남아프리카를 비롯하여 75개국에서 5천 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였고 그녀의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 강연은 40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현대판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에 해당하는 이 작품은 간단한 작품만으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비극적 참사로 혼란에 빠졌을 때 희생자나 유족을 비난하거나 타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악습을 반복한다. 여러 요인이 있겠으나 이는 생명의 가치를 우습게 여기거나 타인의 죽음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결과이다. 그들은 한 인격체의 죽음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지 알지 못한다. 참사의 피해자가 되는 것에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도외시한 소이(所以)이다. 캔디 창은 트라우마를 겪었으나 그 트라우마를 경험했기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세월호 참사의 생존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학우를 잃어버렸으며 그들이 숨질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장본인들이다. 누구보다 그들의 죽음이 아프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들이 ‘운디드 힐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책망과 지탄이 아닌 ‘사회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인생의 혹한기를 보내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책망하고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로하고 돌보는 일이다. 말 한마디라도 따듯한 말을 해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유족들에게 그들이 혼자가 아님을 알게 하고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책임은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있음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주님의 메시지는 강력하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4) 참사 앞에서 서로 비난하는 행태에 종지부를 찍고 세상의 아픔에 동참하는 공동체가 되면 좋겠다. 그 일에 그리스도인이 앞장서는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신앙적 양심의 요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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