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참된 기억과 역사, 그리고 망각의 조건을 넘어서
<기억, 역사, 망각> La mémoire, l'histoire, l'oubli / Paul Ricœur / Le Seuil / 2000.
폴 리쾨르(Paul Ricœur, 2013~2005)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생존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자로 주목받았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현대 신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성서 해석학자이기도 하다. 리쾨르의 <기억, 역사, 망각 La mémoire, l'histoire, l'oubli>은 그가 사망하기 불과 5년 전에 발간한 대표 저작이다. 이 책은 우리가 경험한 과거 사건들이 어떻게 개인 또는 공동체에 다양한 양상과 의미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저자는 본문만 656면에 달하는 방대한 지면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과거 사건이 ‘기억의 현상학’, ‘역사의 인식론’, ‘망각의 해석학’라는 세 가지 층위로 성찰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첫째, 우리의 과거는 ‘기억’을 통해 현재에 재현된다. 그러나 이미 존재하지 않는 과거 사건을 현재에 우리가 기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과연 기억을 통한 온전한 재구성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이 아포리아*는 서양 철학사 전체를 괴롭힌 난제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억을 갑자기 떠오르는 측면의 ‘므네메’(mneme)와 의지적으로 회상해내는 측면의 ‘아남네시스’(anamnesis)로 나누어주었지만, 이 아포리아를 해결하는 궁극적 방안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리쾨르는 참된 기억이 다음 세 가지의 ‘기억 남용’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1) ‘기억장애’(la mémoire empêchée)는 어떤 충격이나 상처로 기억이 손상되어 드러난 병리 현상이다. 이 병리 현상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모두 가능하고 정신분석학적 작업으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2) ‘조작된 기억’(la mémoire manipulée)은 특정 정부나 권력이 스스로를 합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가령 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통해서 실현된다. 3) ‘부당하게 강요된 기억’(la mémoire abusivement commandée)은 스포츠 경기 전이나 국가 기념일 행사에서 낭독되는 문서나 부르는 노래 같은 것들을 통해 실현된다.
둘째, ‘역사’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문자로 객관화하고 공식화한다. 리쾨르는 이 역사화의 작업 영역을 1) ‘기록 보관소’(l’archive), 2) ‘설명과 이해’, 3) ‘역사화 작업’(l’opération historiographique)으로서의 ‘재현’이라는 세 영역으로 나눈다. 이 세 영역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증인의 증언 글들로 대표되는 기록 보관소의 글들은 역사의 원천 자료이다. 물론 역사 자료에는 가장 중요한 증언 등의 문자 자료만이 아니라 지문, 사진 등 다양한 과거 사건의 흔적들도 포함된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 사건을 글로 쓴다는 것은 플라톤의 ‘파르마콘’(pharmakon)처럼 독이 될 수도 있고,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다양한 역사 자료들에 대한 끊임없는 ‘설명과 이해’의 해석학적 순환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이다. 리쾨르는 역사가와 판사를 비교한다. 공통점은 둘 다 진실의 규명을 목표로 하는 의심과 거짓 발견의 대가들이라는 것이다. 차이점은 판사가 최종 결정권을 갖는 반면에 역사가에게는 그 결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즉, 역사는 계속 다시 쓰일 수 있다.
셋째, ‘망각’은 기억과 역사에 대한 위협이자 도전이다. ‘기록 보관소’의 자료들은 망각에 대한 일차 방어선으로서 중요하다. 망각 현상은 단순한 기억의 누락 현상일 수도 있지만, 병리적 기억상실증을 통해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른바 기억장애라는 것인데 리쾨르는 프로이트를 따라 우리가 어떤 충격과 상처로 인해 기억을 통한 접근이 차단된 곳, ‘병리적 망각’(l’oubli pathologique)의 영역이 있다고 본다. 또한 우리에게는 조작된 기억만이 아니라 ‘조작된 망각’(l’oubli manipulé)도 있다. 즉, 특정한 이데올로기적 국면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되고 만들어지는 역사가 있다면, 우리가 있는 그대로를 기억하지 못하도록 몰아가는 금지된 것들이 있는데, 이것들이 결국 왜곡된 결과를 낳는다. 리쾨르는 여기에 ‘강요된 망각’(l’oubli commandé) 즉 일방적 ‘사면’을 하나 더 추가한다. ‘사면’은 ‘제도적 망각’이라고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기보다 진리의 희생을 조장한다는 것이다. 이 사면은 희생자 또는 피해자를 철저히 배제한 해법의 모색이라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반면에 ‘용서’(le pardon)는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최고의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피해자 또는 희생자의 용서 조건은 가해자 또는 피고인에 대한 유죄 평결 및 공적이고 사회적인 심판 상황을 전제로 하며, 그래서 용서를 구해야 할 상황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즉, “용서할 수 없는 잘못과 불가능한 용서 사이의”(entre la faute impardonnable et le pardon impossible, 637면) 간극을 전제로 한다. 그래서 최고의 해법인 용서는 무조건적 선물이 될 수밖에 없다.
리쾨르의 <기억, 역사, 망각>은 얼마 전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큰 충격과 상처를 안긴, 무려 159명의 젊은 생명이 일시에 사망한 10.29 참사 앞에서, 우리가 이 지나간 사건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기억의 남용을 최선을 다해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기억장애, 조작된 기억, 강요된 기억의 무분별한 수용은 불행한 역사의 반복에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 다수가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 설명과 해석 이전에 ‘기록 보관소’에 우선 모아질 수많은 증언과 증거, 관련 흔적들의 확보를 위해 국가와 권력이 최선을 다했는가에 대한 의심이 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여전히 들려오는 유가족의 절규와 목마름은 혹시 이 참된 기억을 위한 첫걸음의 실족에서 온 것은 아닐까? 역사화 작업은 양질의 ‘기록 보관소’의 자료 확보와 함께 그것에 대하여 설명과 해석의 해석학적 순환을 모두에게 개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용서는 최고의 선물이다. 그러나 용서는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해결할 최고 방안 중 하나임이 분명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조건의 예비 없이는 결코 누구도 감히 강요할 수는 없는 불가능한 행위이다.
* 아포리아(Aporia)는 철학 용어의 하나로 어떠한 사물에 관하여 전혀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의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해결이 곤란한 문제, 즉 모순이나 해결 불가능한 역설 등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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