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구약성서에서 ‘정의’(מִשְׁפָט, 미쉬파트, mišpāṭ)는 구체적 현장에서 항상 사회적 빈곤층과 관계가 있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시내 산에 당도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할 때 가장 먼저 등장한 법은 종살이하는 사람들을 칠 년째 풀어주라는 것이었다(출 21:2-6; 신 15:12-18). 이어서 레위기는 경제적 이유로 상실한 토지소유권은 50년째 복귀시키라는 법(레 25장)을, 신명기는 농가의 채무를 일곱번 째 년 탕감해주라는 법(신 15:1-11)을 추가한다. 고대 이스라엘이 군주체제 아래 있을 때 상당수 농민은 채무로 고통받거나(왕상 17:8-16; 왕하 4:1-7), 채무불이행으로 법정에 섰고 재산과 땅을 빼앗기고 가족이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미 3:1-4; 2:1-2, 9; 암 2:6b-7a).
주전 8세기 예언자 이사야는 소위 ‘포도원의 노래’에서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미쉬파트)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미쉬파흐)이요 그들에게 공의(체다카)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체아카)이었도다”(사 5:7)라고 노래했다. 주전 7세기 예언자 하박국 역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미쉬파트)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미쉬파트)가 굽게 행하여짐이라”(합 1:4)라고 탄식했으며, 남 유다가 멸망할 즈음에 활동한 예레미야는 “너희가 만일 정의(미쉬파트)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며 내가 이 성읍 예루살렘을 용서하리라”(렘 5:1)라고 선포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는 가난한 자가 끊이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나라를 심판하는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정의의 법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다.
8세기의 미가는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미쉬파트)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8)라고 선포했다. 그의 어투에 나타난 정의 역시 윤리와 도덕적 행위를 촉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채무 농민 즉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 그들의 채무를 탕감해주거나 종의 신분으로 사는 백성에게 자유를 주는 조치 등의 실행을 담고 있다. 미가에 의하면, 당시 부유층은 일회적이고 과시적으로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은 노심초사했으나, 정작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인적 조치에는 경제적 이해득실을 따져 지극히 인색하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다윗 왕의 통치를 이상적 모델로 삼은 메시아 대망의 말씀들은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판단)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메시아(사 11:4)를 기다린다. 이렇게 의로운 왕 메시아가 오기를 희망하는 말씀들도 가난한 자에 대한 정의(미쉬파트) 구현을 언급한다. 예수의 오심을 메시아 대망의 성취로 이해하는 우리 교회가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탐구하는 일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서가 언급하는 정의는 언제나 힘없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조치와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런 조치를 명시한 율법들은 출애굽 구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언약 백성의 미래를 결정하는 삶의 태도로 제시되어 있다. 구약성서의 정의는 “가난하고 무능하여 상처 입은 자를 구제하고 구원해 주는 일”을 가리킨다. 따라서 가난으로부터 구원해 주는 정의가 구약성서의 핵심이다. 그것은 영혼 구원이나 영적 구원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현실의 삶이 뒤따르지 않는 신앙과 구원도 무의미하다.
누가복음이 묘사한 예수의 공생애는 나사렛 회당에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다”(눅 4:18)라는 말씀 선포로 시작한다. 가난한 자에게 전할 복음 즉 기쁜 소식이란 그들을 구제하기 위한 율법에서 명시한 각종 조치를 내포한다. 비록 마태복음은 이 가난한 자를 “심령이 가난한 자”로 변형시켰지만 가난한 자는 예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한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목적 삼고 예수의 지상 사역을 대리하는 조직이라면 교회 구성원 가운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구제하는 일은 이집트에서 혹독하게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에 해방과 자유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신 속성과 맞닿아 있다(출 3:7; 호 2:1). 가난한 자의 구제는 교세 확장 여부와 상관없이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DNA이다. 구제 사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교회 사업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교회의 본질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교회의 모습은 이 세상에 예수 복음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파할 수 있다. 그런 교회가 ‘정의’(미쉬파트)를 실현하는 교회이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증언하는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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