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따뜻한 도시락을 들고 처음 서울역으로 향했던 날, 차가운 칼바람을 종이 박스로 막으며 침낭을 뒤집어쓴 채 노숙인들이 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구석에서는 술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고 술에 만취한 한 남성 노숙인이 갑자기 우리를 향해 욕을 하기 시작했다. 봉사하러 오신 분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모두 귀를 막았다. 도무지 들을 수 없는 말이었고, 그날은 거기서 사역을 멈추고 복귀를 결정했다. 그때 나는 이대로 가면 앞으로 계속 반복될 것 같아 혼자 남아서 이야기를 나눠보기로 마음을 먹고, 한 걸음씩 그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더 심한 욕설을 하였다. 신기하게도 욕 세례를 퍼부으며 무섭게 거친 행동을 하는 그분을 보면서 두려움보다 긍휼한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자세를 낮추고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저는 아저씨를 돕고 싶습니다. 전 목사예요. 하나님은 아저씨를 아주 많이 사랑하세요. 하나님 사랑을 아저씨에게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아저씨가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고 싶어요. 진심입니다.”라고 계속 말하였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침을 튀기며 욕을 하시던 그 아저씨가 갑자기 말을 그치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더니 제 품에 안겨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살려 주세요. 저도 살고 싶습니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목사님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나는 사실 품에 안겨 우시는 분이 여전히 무섭고 어색했지만, 그 고백에 정말 놀라워하며 안아드리고 기도를 해 드렸다. 그 순간 저는 연약한 인간의 죄의 그늘 속에 가려져 웅크려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았고, 이 사역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다. 노숙인 사역은 옷과 밥과 주거지 등 무엇을 마련해 드리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세상의 모든 편견을 뚫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위해 십자가 사랑으로 그들을 끌어안는 영적인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형상을 회복하려면 무엇보다 눈높이를 같이 하는 공감의 마음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분들이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은 의외로 진실하고 순전한 사랑이고 그 따뜻한 구원의 손길을 열렬히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첫 발걸음의 현장에서 깨닫게 되었다.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서울역에 나가 도시락을 나누고 복음을 전하다 보니, 노숙인들이 매일같이 삼일교회로 몰려왔다. 새벽에 식사하시는 분들이 갑자기 300~400명에 육박하였다. 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이분들에게 진정한 생명의 양식임을 처음부터 깨닫게 하셨기에 식사 후 예배도 함께 드리게 되었고, 수요예배, 금요예배, 주일예배 등 노숙인분들이 환대받으며 편안하게 예배드릴 수 있도록 공간도 마련하였다. 복음은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말씀만이 아니라 삶의 영역까지 순종하게 되는 총체적인 것이다. 이것을 하루하루 사역 속에서 동역자들과 함께 깨닫게 되면서 이분들과 삶 전반을 같이 하게 되었다.
지금은 옷과 밥을 나눠 주는 것 외에 고시원을 운영하면서 임시주거지를 마련해 드리고, 임대주택을 얻을 수 있도록 함께 발품을 팔고, 전인적 회복을 목적으로 매 학기 10여 개 반의 주간 자활 프로그램들을 운영하고, 또한 정서적인 치유와 경제적 자립을 위해 농장운영과 카페도 경영하면서 그분들이 손 놓고 계셨던 꿈을 다시 가질 수 있도록 섬기고 있다. 갑작스레 몰려온 이분들을 위해 교회가 식당과 예배, 각종 모임 공간을 내어주며 환대하는 모습은 서울역 사랑나눔부의 담당 목사인 저로서도 놀라운 배려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성도들의 이 아름다운 섬김과 사랑은 2019년 한 해 동안 세상에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교회의 나아갈 방향성을 줄기차게 강단에서 말씀을 나눠주셨던 담임 목사님의 목회 철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청년 사역을 내려놓고, 지금까지 5년의 짧은 기간을 이분들과 함께하며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닫게 된다. 먼저는 십자가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가 아니면 결코 진실한 사랑을 할 수 없고, 죄에 휩쓸려 표류하는 영혼을 살릴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욕을 듣고, 뺨을 맞으며, 기물들이 내동댕이쳐지는 일들을 수없이 볼 뿐 아니라 주민센터와 병원과 법원과 구치소를 오가며 온갖 행정적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일들, 그리고 반복되는 중독의 문제로 변화가 보이지 않아 끝없는 절망의 감정들을 경험하면서도 예수님을 떠올리며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뚜벅뚜벅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하는 일. 이 모든 일은 어찌 보면 견디기 어려운 힘겨운 순간들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가 십자가를 묵상하며 감당해 갈 때 이들의 아주 작은 한 눈금이 자라가는 것을 보게 된다. 누군가의 시간과 건강과 물질의 희생과 포기가 없이는 도무지 영혼이 자라갈 수 없다는 말씀(요 12:24)이 진리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순종의 행렬은 복음을 누리는 자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며 능력이다. 복음이 없는 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섬김이다. 그리고 또 깨닫게 되는 한 가지는 섬기는 자들의 축복이다. 처음에는 봉사자들 자신이 섬기는 줄로 생각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얼마나 자신이 사랑 없는 자인지 깨닫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처절하게 붙들게 되며, 점점 자신의 성품과 마음도 연단되고 결국 주님께 가까이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신이 얼마나 사랑 없는 죄인인지 깨닫고, 주님 곁에 머무르게 되는 이것이 가장 큰 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삼일교회가 서울역 근처에 있어 이 귀한 사역 한 모퉁이를 섬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진행하고 있는 복지법인 ‘헤세드’가 잘 세워져 세상에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예배하며, 선교하면서 예수 안에 한 가족이요 교회 공동체로서 같이 살아갈 아름다운 날을 매일 꿈꾸고 있다. 고치고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용납하고 포용하며,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이 충분히 존중받고 사랑받으며 회복되는 그 놀랍고 뜨거운 사랑 공동체로 빚어지기를, 그렇게 소외된 이웃들에게 우리 예수님의 사랑이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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