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미술가들은 이웃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았으며 대화하고 접촉면을 넓혀갔을까? 이 문제를 19세기 후반 네덜란드의 화가 요제프 이스라엘스(Jozef Israëls, 1824-1911)의 작품을 예로 들어 살펴보자. 네덜란드 흐로닝언의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스라엘스는 유년시절 부친을 따라 상업에 종사하였으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 파리로 유학하여 그곳에서 미술을 배웠다. 때마침 파리에서는 밀레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스는 밀레의 전시를 본 후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농부들의 실생활에 기초한 생동감 나는 사실주의는 그의 예술에 이정표가 되었다.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온 그는 평소 자신이 흠모해오던 밀레처럼 서민들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따듯한 색감과 잔잔한 터치로 해변 풍경과 어촌의 가족상을 그렸으나 본격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차에 그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겼다. 이스라엘스는 하르렘(Haarlem) 인근의 잔트포르트(Zandvoort)라는 마을에 머물며 요양하게 되었는데 이 기간에 특히 마을의 어촌 공동체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끌렸다.
현재 잔트포르트는 리조트가 들어서고 피서객들이 몰리는 명소가 되었지만 19세기만 해도 위험스럽고 빈곤한 어촌에 불과했다. 이스라엘스는 그곳에 머무는 동안 가난한 어부들과 그 가족의 삶을 가까이에서 엿볼 수 있었고 그들에 대한 긍휼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해 남부러울 것 없이 살았던 이스라엘스는 잔트포르트 어부들의 비참한 생활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를 공감의 언어로 전달하게 된 것이다. 거기서의 생활은 그의 인생과 예술을 송두리째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부터 그는 진정으로 사랑과 연민으로 가득 찬 새로운 표현에 사로잡혔다.
이스라엘스의 예술세계에 돌파구가 되어준 <익사한 사람을 나르는 어부들>(1862)은 어부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펼쳐놓고 있다. 멀리 난파당한 배가 떠 있고 화면 하단에는 여러 사람이 시신을 뭍으로 옮기는 비극적인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화면은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진 여인과 영문도 모른 채 엄마 손에 붙들린 두 아이, 그리고 뒤를 이어 시신을 안고 걸어 나오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농부를 모티브로 한 작품에서 이와 비슷한 측면을 볼 수 있다. <식탁에 둘러앉은 농부가족>(1882)은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식탁에 놓인 음식이라야 빵과 스프 정도가 전부이고, 가재도구도 변변한 것이 없는 지극히 가난한 가정이다. 아내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는 중인데 아이들이 배가 고픈지 음식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맞은편에 앉은 남편은 약간 지친 기색으로 멍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불기가 없는 탓인지 집안 분위기는 더욱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이처럼 이스라엘스는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나타내면서 그들과 밀착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스의 예술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약자들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감상자에게 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육안으로 본 것뿐만 아니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것을 본 장면에 매료되기를 바란다.” 그의 시선에는 아픔을 겪는 사람들이 들어왔고 이스라엘스는 그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의 실재를 속속들이 담아냈다. 기댈 곳 없는 타자를 품는 일이야말로 그의 예술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가난한 이들의 벗이 된다는 것은 창작을 소명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측면이다. 그들이 느낀 것에 공감하고 이를 잘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이스라엘스가 지닌 비밀 중 하나였다. 우리 주변에는 잔트포르트 주민같은 이웃들이 있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극심한 생활고로 힘겨워하고 심지어 극단적인 상황까지 떠밀리기도 한다. 조금만 주위로 눈을 돌리면 네덜란드 화가들이 만났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 덩어리의 빵을 부풀리는 ‘누룩’이 되어야 했던 것은 그분의 나라가 죽은 이후에만 성취되는 먼 훗날의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하늘나라 선포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하는 달라진 세계질서를 요구하는 외침이었다. 이것이 우리 세계를 위한 예수님의 좋은 소식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아갈 때,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그분의 사랑과 성품을 엿볼 수 있게 하실 것이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말처럼 “하나님은 자기 존재의 안위가 아니라 참 대화에 몰두하시며 이 대화는 타자의 안녕을 되살리고 영원한 찬가를 부르게 해준다.” 타자와의 대화와 교감에서 비롯되는 행동은 비록 화려한 말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있게 체험하게 해 준다. 우리의 모습을 보고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 나라의 그림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 취급방침 | 공익위반제보(국민권익위)| 저작권 정보 | 이메일 주소 무단수집 거부 | 관리자 로그인
© 2009-2024 (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고유번호 201-82-31233]
서울시 강남구 광평로56길 8-13, 수서타워 910호 (수서동)
(06367)
Tel. 02-754-8004
Fax. 0303-0272-4967
Email. info@worldview.or.kr
기독교학문연구회
Tel. 02-3272-4967
Email. gihakyun@daum.net (학회),
faithscholar@naver.com (신앙과 학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