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20세기 기독교 세계관 철학자 중, 네덜란드의 헤르만 도여베르트(Herman Dooyeweerd, 1894-1977)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가 정립한 성경적 세계관의 바탕 위에서 피조 세계를 가장 일관성 있게 설명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철학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여러 면에서 그의 철학은 비판을 받았고 동시에 그의 제자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사상은 반드시 한번 검토할 가치가 있다. 대가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가 씨름한 서양 철학 전체를 그의 눈으로 살펴보는 것이고 그가 기독교 철학자로서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에게도 성경적이면서도 비판적 관점들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필자는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신앙과 삶>의 ‘온전한 지성’ 지면을 통해, 지난호 도여베르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간단한 개요를 필두로 5회에 걸쳐 그의 사상과 영향에 대해 간략히 다루어 보겠다.
헤르만 도여베르트의 기독교 세계관(2) - 성경적 창조론
도여베르트는 카이퍼 연구소에서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룬 중심 명제, 즉 ‘이론적 사상의 종교적 뿌리’에 관한 통찰력을 얻은 후 자유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적 출발점은 성경의 창조론에 근거한다. 그가 먼저 강조하는 철학적 이념인 ‘의미’(zin: meaning)는 바로 이 창조적 세계관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성경은 만물이 창조되었고 따라서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Arche: Origin)이시며 지금도 만물을 다스리시고 궁극적으로 완성하신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는 모든 실재를 ‘의미’라고 규정한다.
피조물에 의미가 ‘있다’라고 하기보다 피조물 자체가 의미‘이다’라고 하는 것이 다소 생소하게 들리지만, 그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피조물이 자기충족적(self-sufficient)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시는 하나님’(God as the meaning-Giver)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로마서 11장 36절, 즉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는 말씀에 의미의 목적, 만물의 기원, 존재의 근거, 그리고 궁극적 목적이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고 강조한다.
그가 ‘의미’라는 용어를 도입하는 것은 그리스 철학에서 나온 ‘존재’(being)라는 단어가 가장 포괄적인 단어로 더는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인간의 이성 및 철학적 사고의 자율성을 절대시한 전통적인 내재철학(內在哲學, immanent philosophy)에서 사용된 ‘실체’(substance)라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너무 독립적인 성격이므로, 이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으로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한 전통적 형이상학과 존재론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려고 시도함을 볼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의미로서의 피조계는 혼란스럽거나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잘 정돈되고 구조적인 전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만물을 지으실 때 완전한 지혜로, 창조 질서에 따라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실재에는 계획된 구조가 있으며 그 기본 구조를 ‘세 가지 선험적 이념들’(three transcendental ideas)을 사용하여 설명한다. 여기서 ‘선험적’이라는 말은 이러한 이념들이 철학적 사고의 전제가 된다는 의미이다.
첫 번째 이념은 만물의 ‘기원’(Origin)이다. 도여베르트의 경우 만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대로 창조된 것으로 그분에게 의존한다. 하지만 창조를 부인하는 진화론도 기원에 대한 이념은 있는데 그것은 ‘우연’(Chance)이다. 그리스 철학도 바로 여기에 관한 관심을 가지고 만물의 근원(Arche)이 무엇인지 탐구했다.
두 번째 이념은 모든 현상의 다양한 면들과 양상들의 ‘뿌리가 되는 통일체’(root-unity)이며 ‘의미의 총체’(meaning-totality)이다. 다시 말해 모든 현상이라는 구슬들을 하나로 꿰어 초점을 맞추게 하는 그 통일점을 뜻한다. 그는 이것이 제2의 아담이며 모든 시간내적 실체의 종교적 뿌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발견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각 개인은 존재의 종교적 중심 또는 집중점인 ‘마음’을 통해 이 의미의 총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념은 ‘우주적 시간으로 연결된 의미의 다양성’(meaning diversity in the coherence of cosmic time)이다. 이것은 의미의 다양한 양상들과 개체 구조들을 뜻하며 이 두 가지는 시간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이 세 가지 요소를 처음에는 ‘법이념’(wetsidee: cosmonomic idea 또는 the idea of law)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가 원래 법철학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에는 창조의 ‘법’ 또는 ‘질서’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이 용어를 수정하여 ‘선험적 기본 이념(transcendentaal grondidee: transcendental ground idea)’이라고 불렀다. 그에 의하면 모든 철학과 학문은 이러한 ‘법이념’을 형성하는 ‘전이론적 전제들’(pre-theoretical presuppositions)에 의존되어 있다. 즉 이 세 가지 이념들은 모든 학문 활동에 필요한 전제들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피조계에서 두 가지 기본 구조를 구별한다. 즉 ‘개체 구조’(individuality structure)와 ‘양상 구조’(modal structure)이다. 전자는 창조로 주어진 구체적 사물의 법적 질서를 뜻하며, 후자는 각 의미의 핵을 가진 특정 양상을 의미한다. 그는 볼렌호븐과 함께 이 ‘실재의 양상 이론’(the theory of modal aspects of reality)을 발전시켜 각기 독특한 법칙들에 따라 지배받는 15가지의 ‘법칙 양상들’(wetskringen: law-spheres, modal aspects)을 구별했다. 즉 수적, 공간적, 운동적, 물리적, 생물학적, 감각적, 분석적, 역사적, 언어적, 사회적, 경제적, 미적, 법적, 윤리적, 그리고 신앙적 양상이다. 그는 각 양상이 서로를 지시하며 하나의 정합성(coherence)을 이루어 의미의 총체성을 지향하고 이것은 다시 만물의 기원을 향한다고 말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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