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정(精)과 한(恨)의 한국적 SF드라마 ‘정이’
새로운 장르를 향한 모험과 도전을 즐기는 연상호 감독이 이번에는 SF영화로 돌아왔다. <부산행>(2016)과 <반도>(2020)를 통해 한국적 좀비 영화를 탄생시키고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감독이었던 까닭에 AI 로봇이 등장하는 SF영화를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하는 점은 영화계의 큰 관심사였다. 특히 넷플릭스로부터 200억 원의 제작비를 지원받아서 만든 까닭에 시청각 효과를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미래세계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사면서도 한국인 특유의 문화와 정서가 녹아난 특별한 작품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정이>는 AI 로봇과 로봇을 개발한 사람이 모녀지간이란 관계 속에서 인간의 죽음과 정체성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과거 AI 영화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시각을 읽을 수 있다. 혈연관계가 중요한 한국의 정서는 안타까운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정과 한을 생성시키며, 이는 어떤 AI 장르의 영화 속에서도 볼 수 없는 연상호 감독 특유의 영화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볼 수 있다.
반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AI 전투 로봇을 개발 중인 크로노이드사의 윤서현(강수연) 박사는 35년 전 뛰어난 활약을 보이다 작전 실패로 식물인간이 된 어머니 윤정이(김현주) 용병의 뇌를 복제하고 이를 데이터화 하는 데 성공한다. 영웅화된 이미지를 갖고 있는 윤정이 용병의 이름을 따서 ‘JUNG_E’로 명명된 AI 전투 로봇 사업은 그녀가 가진 모든 전투기술과 강한 충성심, 의지까지도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전투 AI를 개발하려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복제된 윤정이 용병의 뇌에서 전투에 대한 정보 외에 어린 딸에 대한 애정이 담긴 신호를 읽으면서 윤서현 박사는 ‘JUNG_E’가 폐기처분 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손을 쓰기 시작한다.
AI 시대의 죽음의 극복
영화 <정이>는 뇌 복제를 통해 인간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진 안드로이드 로봇에 대한 법적인 보호와 윤리를 언급하며 죽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보여준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윤서현 박사가 의사로부터 제안받은 것은 뇌 복제가 일반화된 미래세계를 나타내듯 AI 로봇을 통해 삶을 지속시키는 일이다. 영화는 세 가지 타입을 제시한다.
첫째 A-type은 하나의 의체(義體)에 대상자의 뇌를 복제하여 옮기는 시스템이다. 즉 겉모습만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복제된 뇌 소유자의 경험과 기억 그리고 정보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본래의 인간과 구별하기가 힘들다. 영화 <정이>에서 A-type이 인간에 준하는 법적인 보장을 받도록 되어 있는 점은 뇌 복제를 통해 탄생한 AI 로봇은 인간사회에 적극적으로 수용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즉 인간과 AI 로봇 사이의 정체성 논란이 미래세계에는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A-type의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다면 다만 돈이 무척 많이 든다는 점일 뿐이다.
둘째 B-type은 인간의 기본권 가운데 결혼, 거주이전의 자유, 입양 등의 권리가 제한을 받는다. 윤서현 박사에게 말기암 판정을 내린 의사의 경우 상반신만 인간의 모습을 갖고 기능하는 B-type의 전형이다. A-type에 대한 비용이 부담스러울 경우 복제된 뇌의 데이터를 정부기관에 제공한다는 데 동의하는 조건으로 B-type을 선택할 수 있다. 그것마저도 비용이 부담스럽다면 C-type을 선택할 수 있지만 대신 인간의 대우를 전혀 받을 수 없다. 뇌가 가진 데이터를 기업에 전부 넘기고 비슷한 클론을 무수히 만들어 낼 수 있어서 인격체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C-type 같은 경우는 전혀 비용이 들지 않고 유족들에게 지원금이 전달된다. 윤정이 팀장도 어린 딸의 수술비를 대기 위해 자신을 닮은 수많은 AI 전투 로봇이 양산될 수 있는 C-Type으로 크로노이드와 계약했었다.
뇌과학과 자본의 위력
고대 이집트 사회의 장례문화에서 미라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장기는 죽은 자의 심장이었다. 심장을 저울에 달아 심판의 기준으로 삼았고, 심장은 단지에 잘 보관하여 죽은 자의 부활에 대비했었다. 그러나 미라를 만들 때 뇌는 쓸모없다고 생각하여 버렸다. 그런데 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세계에서 인간의 영속적 삶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뇌이며, 뇌를 다루는 뇌과학의 발전은 AI 기술을 통해 얼마든지 인간의 죽음을 유보할 수 있는 미래세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돈에 달려있다. 돈이 있는 자는 A-Type의 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생존할 수 있지만, 돈이 없는 경우 C-Type을 선택하여 상품의 소프트웨어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영화가 제시하는 미래사회 역시 돈이 있으면 살고 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된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딤후3:2) 세상이 곧 디스토피아의 세계임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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