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요즘 시대는 비관주의를 넘어 니힐리즘이 팽배하는 것 같다....” 친하게 지내던 선배와 대화를 나누던 중 나온 이야기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필자 역시 끝없이 경쟁과 자기계발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소망을 갖기보다는 절망을 원동력 삼아 매일의 삶을 그저 열심히만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뒤처지게 될 때 느끼게 될 좌절감 때문에 전전긍긍하며 그저 가야 할 길을 모른 채 경주마처럼 달려가고만 있었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며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필자는 끊임없는 입시의 굴레 속에 갇혀 있는 우리 청년들의 현실을 경험하기도 하고 느끼기도 하고 있다. 유년시절과 10대의 전부를 바쳐 대학 입시를 마친 요즘 대학생들이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것은 취업이라는 또 다른 입시의 관문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내신시험으로 경쟁했던 것처럼 성적을 잘 준다는 소위 ‘꿀 강의’만 찾아서 듣게 된다. 이 경쟁에서 성공한 학생들은 로스쿨 진학을 준비하며 쾌재를 부르고, 학점을 잘 받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이 좋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전문직종(요새 문과 대학생들에게는 공인회계사 시험이 유행이다.)을 찾아 나선다.
운 좋게 취업이라는 입시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혼이라는 또 다른 입시에 마주하게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서 약속을 하는 것이 무슨 부담이 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을 ‘누구나 다 하는 것 만큼’ 하려면 결혼식 행사를 준비하는 데 3,000만 원 이상의 돈이 필요하다. 그것 외에도 배우자의 외모와 직업이 어떻다느니, 신혼집은 어디로 구했다느니, 혼수는 어디 제품으로 했다느니 등등의 주제가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감안하면, 결혼을 준비하는 비용은 어느새 사랑을 꿈꾸던 두 청년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가뿐히 넘어서게 된다.
다행히 마음 맞는 사람과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 청년들이 겪는 입시의 굴레는 끝날 줄 모른다. 임신하기도 어려워서 시험관 시술을 받느라 고통받는 부부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다행히 출산하게 되더라도 산후조리원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다녔는가로 비교하고 경쟁한다. 아이가 조금씩 자라가면서는 육아용품은 어디 회사의 제품을 쓰고 있는지로 비교하고, 명품 유모차를 타고 있는지 확인한다. 아이가 커가면서는 영어 유치원을 보낼 수 있는 재력이 있는지를 바탕으로 경쟁하게 되고, 그 경쟁에 실패하는 부모들은 국공립유치원을 보내기 위해 사활을 걸어야 한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는 순간 또다시 부모가 12년 동안 겪었던 입시의 굴레가 자녀세대에서 다시금 반복되게 된다.
혹자는 서로 비교하는 굴레 속에서 빠져나가면 괜찮을 텐데, 왜 청년들이 그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굴레에서 빠져나가기에는 비교와 경쟁이라는 덫이 우리 청년세대를 공고하고 교묘하게 짓누르고 있다. 어쩌면 학창시절 소위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들과 자신을 비교하던 청년세대가 그 비교 대상을 내면화하여 이제는 ‘인친’(인스타그램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손가락만 움직이면 확인할 수 있는 인친들의 끝없는 성공신화와 행복한 모습에 잠식되어 내가 가야 하는 바를 알지 못한 채 그저 경쟁에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것을 나의 소망으로, 남들에게 잘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나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모습이 우리 청년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 43:5)
결혼을 준비하면서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낙심이 임박할 때마다 곱씹고 있는 말씀이다. 42편에서부터 이어지고 있는 이 시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외부의 상황을 조명하고 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리고 나를 찌르는 대적들이 비방하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조롱하고 있다. 원수의 공격과 조롱을 겪으며 하나님이 과연 나를 도우시는가 의심이 들기도 한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강조한다. 그가 나타나 도우실 것이며, 이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할 것이라고 다짐하고 결심하며 또 한 번 더 결의를 다진다.
나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내 앞에 있는 경쟁자만 바라보도록 추동하는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내가 그리고 우리가 불러야 하는 소망의 찬송은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라는 고백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아가 이 찬송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의 임원으로서 무언가를 제언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나타나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는 등대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제안하고 싶다. 나아가 무한 경쟁의 사회 속에서 여전히 찬송할 수 있는 소망을 노래하는, 그 소망을 전할 수 있는 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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