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태어난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향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롬6:23). 현대 인류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인간의 어떤 노력도, 과학 기술의 눈부신 발전도 인간을 죽음에서 건질 수 없다. 일평생 수고하다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창3:19). 인생사를 가만히 보라. 인간은 죽고, 죽은 자는 잊혀진다. 죄인의 결론은 ‘소멸’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도 유사하다. 2001년부터 대한민국은 저출산 국가에 진입했다. 지금은 초저출산 국가다. ‘국가 소멸’ 경고등은 켜진 지 오래다. 2022년에 세운 ‘합계 출산율 0.78명’이라는 세계 최저 신기록은 2023년 2분기 ‘합계 출산율 0.70명’으로 경신되었다. 이 기록도 언제 깨질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젊은이들은 결혼을 기피한다. 결혼해도 출산을 거부한다. 지난 2006년 데이비드 콜먼(David Coleman) 교수가 예견한 ‘인구소멸 1호 국가’를 향해 가고 있다. 지금이라도 모든 역량을 동원해 소멸을 막아야 한다.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정부는 오랜 기간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상황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다. 각계 전문가들은 다양한 원인과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남녀 차별적 문화, 경쟁주의, 높은 생활비와 과도한 교육열 등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보육 제도와 근로 문화 개선, 전폭적인 경제적 지원을 요구한다. 충분히 고려해야 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생각해봐야 한다. 여기에 답이 있을까? 저출산 문제의 본질을 봐야 한다. 소멸의 이유가 ‘우리의 죄악’이라는 것이다(사64:7). 문화나 제도, 경제 문제보다 깊은 곳에 ‘인간의 죄성’이 있다. 나만 위하는 이기심(利己心)이다. 결혼과 출산이 요구하는 이타적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탄의 충동이 있다. “너를 만족시켜라!” 사탄은 인간의 시야에서 하나님을 지운다.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세상’을 만든다(삿17:6, 21:25). 그 결과는 사랑에 대한 오해다. 사랑을 욕망과 쟁취로 바꾸는 것이다. 그러면 결혼도, 출산도, 육아도 본래의 의미를 잃고 불편하고 힘든 것이 된다.
사랑은 주는 것이다.(요일4:10).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라.(롬5:8). 인류의 모든 고통은 십자가 사랑으로 해결되었다. 우리는 이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소멸을 막는 힘은 사랑에 있다.(아8:6-7). 그래서 길은 명확하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Ad Fontes)이다. 언제나 성경이 답이다. 저출산의 해법도 성경에 있다. 우리는 태초의 가정에 주어진 창조주의 명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세기 1:28)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은 인간의 존재 목적이다. 가정의 근원이다. 여기서 멀어지면 인간도, 가정도 길을 잃는다. 창조의 명령으로 돌아가야 한다. 시작은 출산과 양육을 ‘복’(ברך)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생육과 번성을 명령하시기 전에 복을 주셨다.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자녀는 축복이다. 자녀는 부모를 짓누르는 책임과 의무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에 자녀가 있다. 그래서 시편 127편 3절은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노래한다. 자녀는 창조주의 선물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속적으로 ‘자녀가 축복이라는 사실’을 선포해야 한다. 수영로교회가 매주 주일 예배마다 ‘아기 축복기도’를 하는 이유다. 교회에 처음 나온 생후 100일 전후의 아기를 안고 강대상에서 기도하는 시간이다. 매주 3~4명 아기를 축복하는데 매번 아기가 등장할 때마다 성도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다. 자연스레 교회에 따뜻함이 흐르게 된다. 또한, 3040세대가 교회에 정착하는 데 유익하다. 일부러 등록하는 남편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목회적 유익이 목적은 아니다. 결혼과 출산, 자녀 양육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는 사역이다. 여기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라는 명령에 순종할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자녀를 낳는 이유는 사랑이다. 의무감으로 안된다. 위기감을 조성한다고, 돈을 준다고 출산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녀를 키우기 힘드니까 도와주겠다”라는 방식의 접근은 해법이 될 수 없다. 사랑이 핵심이다. 자녀를 축복으로 여겨야 출산을 결심한다. 그러려면 부모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 교회가 ‘함께 자녀를 키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 뒤에 ‘정복과 다스림’을 명하셨다. 인간의 사명은 단순히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대리 통치자로 키우는 것’까지 포함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녀를 함께 키우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자녀가 성장하며 마주하는 주요 단계들(Milestones)을 축복하는 동시에 각 단계에 필요한 목양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자녀를 사랑하는데 집중할 수 있다. 그 모습이 공동체에 ‘자녀를 낳아도 된다’라는 메시지가 된다.
“나도 아이를 낳으면 저렇게 힘들겠지.”,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거야.” 저출산은 미래에 대한 염려다.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부정적으로 단정짓는 것이다. 그래서 ‘인식의 문제’다. 문화적 영향이 크다. 인식을 바꾸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제도 개선, 지원 확대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녀를 축복하며 함께 키우는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 누가 할 수 있을까? 교회다. 교회는 소멸을 막는 생명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아니, 교회가 해야 한다. 교회는 생명 없는 시대의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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