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독교세계관학술동역회 기관지
어쩌다 보니 다섯 자녀를 두게 되었다. 소원이나 기도의 성취는 아니다. 결혼 첫해에 아이를 낳은 후 준비 없이 부모가 되었다는 생각에 둘째를 낳기까지는 5년이 걸렸다. 이 아이가 순해서 한 명 더 키워도 좋겠다는 생각에 셋째를 낳았다. 넷째의 임신 소식은 사실 나이 50을 코앞에 둔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한 아이를 더 주셨다. 그 덕에 ‘애국자’, ‘능력자’라는 덕담을 듣는다.
그 배경에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었다.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을 늘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녀를 낳아 가르치는 것이다.”라는 말을 강단이나 교우들의 입을 통해 종종 들었다. 나처럼 다섯 자녀를 둔 가정이 그 교회에는 여럿 있다. 외국의 개혁교회 계열의 교회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라고 한다.
많은 자녀가 복이고 중요한 사명이라는 점은 창세기 1장 26~28절에 나온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스킬더(Klass Schilder) 박사가 ‘문화명령’이라고 일컬은 이 구절은 사람의 창조 목적이 피조물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알린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능력은 매우 제한적이므로 이 넓은 피조 세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좀 거칠게 말하자면 자녀를 낳아 잘 키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존재 목적의 절반은 수행한 셈이다.
뚱딴지같은 생각을 해 본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굳이 이런 불편한 방법을 쓰지 않고 사람들을 성품과 능력을 완비한 성인으로 필요한 만큼 한꺼번에 지으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인생의 문제 절반은 해결되는 게 아닐까?” 그랬다면 문화명령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수행되었을 거라고 상상해 본다. 그런데 하나님이 택한 방법은 그게 아니었다. 사람을 구원해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도 아주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하셨듯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과정도 불완전한 사람에게 맡기는 불안한 방법을 택하셨다. 시간 속에서 몸으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이 일을 힘들고 지루하고 도대체 밝은 결말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길을 밟아 사람을 키워 내게 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피조물을 바르게 다스리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이 우리 시조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에서 일탈하지 않게 하려고 선악과 금령을 주셨다. 여기에 하나님은 한 가지를 더하신 것은 혼자 있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을 지어 주신 일이다. 돕는 배필을 통해 아담이 얻은 것이 무엇일까? 아담은 하나님이 데리고 오신 여자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라고 한다. 사랑을 발견한 것이다. 아담은 아내를 통해, 아내와 함께 사랑을 배웠다. 잠언 18장 22절에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라고 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아내를 통해 사랑을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듯하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는데, 아담은 이 기본적인 품성을 아내를 통해서 얻기 시작한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이 사랑 속에서 사랑을 경험하고 배워간다. 주님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만물을 다스릴 사람들이 땅에 가득하기를 원하신 것이라 생각한다.
결혼 전에는 열두 명 아이를 낳아 합창단을 만들겠다는 우스갯소리도 해 보았지만, 도무지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였다. 아이가 늘어나면 주택비에서부터 생활비, 교육비까지 모든 비용을 명수만큼 곱해야 한다. 요즘은 정부가 다자녀에 대한 지원을 공공요금에서 대학교 장학금 지원까지 다양화하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다. 더 어려운 문제는 아이들을 감싸고 있는 이 시대의 사고방식, 가치관이다. 어떤 객관적인 기준, 가치관, 권위체계도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이 아이들은 몸으로 체득하고 있다. 10대 아이가 벌써 자기는 이미 정신적으로 다 성장했다고 독립선언을 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영생하시는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하셨다. 그 결과 시간 속에서 사는 인생인 우리도 영생에 참여한다. 그 한 예가 혼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혼인할 때 배우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하겠다고 서약한다. 주님의 은혜로 이 서약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면, 그게 영생의 한 자락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자는 아이를 낳으면 유아세례를 준다. 이 아이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있음을 고백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고 그렇게 키운다. 이 언약도 부모는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이룬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은 사람에게 주어진 중대한 사명이고 도전이지만, 동시에 이것도 신자가 누리는 영생의 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주 오래전에 대학의 한 선배가 자기 인생의 최대실수는 아이를 낳은 일이었다고 토로하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이유는 앞으로의 세상이 지금 자기 세대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어려운 시대에 누가 자식을 낳아 키우겠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아니면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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